무라카미 하루키 <작지만 확실한 행복>
"최근에는 맛있는 두부가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자동차 수출도 좋지만, 맛있는 두부를 없애는 국가 구조는 본질적으로 왜곡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 127쪽 -
그러니까 '두부'에 대해서라면 나도 꽤 할 말이 있는 사람이다. 세계 두부 동호회라는 것이 런던에서 - 왜 하필 런던인지는 알 수 없다- 개최되어 두부를 좋아하는 순으로 줄을 세운다면 나는 분명 1237번 안에는 들어갈 것으로 여겨진다.
어릴 때 어머니와 아버지는 내게 갖가지 심부름을 시켰는데 가장 싫어하는 것은 역시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필요한 '매직스'를 사러가는 것이었고, 가장 좋아하는 것은 두부를 사러 가는 것이었다. 내가 살던 달동네에서 시장까지는 걸어서 무려 28분 32초가 걸리는 거리였는데, 두부를 사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장까지 걸어갔다 와야 했다. 천 원짜리 한 장을 손에 꼭 쥐고 두부를 사러 가는 길은 마치 소원을 이루어주는 드래곤볼의 마지막 볼을 찾으러 가는 것만큼의 설레임이 있었다. 맛있는 냄새가 가득한 시장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모양과 빛깔이 가장 빼어난 두부 한 모를 골라 검정 비닐 봉다리에 넣어 오는 길은 행복한 상상으로 가슴이 뛰었다.
'두부는 그냥 먹어도 좋고. 간장에 찍어 먹어도 좋고. 국에 넣어 먹어도 좋으며 부치거나 구워 먹어도 일품이다.'
그런 최상의 찬미를 속으로 연신 해대며 오르막길을 오르면 내가 오르막길에 있는지 내리막길에 있는지 좀처럼 구분이 안 되었다. 어머니에게 두부를 가져다 바치는 날에는 반드시 최상의 두부 요리가 나오는 날이어서 나는 이제나 저제나 어머니가 두부를 사오라고 시킬 날만을 손꼽으며 살았던 것이다.
하루키의 여러 에세이집에서 일상의 소박한 이야기를 담은 것만을 추려 모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은 읽고 있으면 확실히 행복해지는 책이다. 두부를 좋아하는 하루키는 두부에 대한 탐미의식을 드러내기도 하고, 만년 꼴찌를 하지만 언제나 응원하고 있는 야구팀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한다. 때로는 쌍둥이 자매와 동시에 데이트를 하는 일에 대한 상상을 발전시키기도 하며, 전공이었던 영화에 대한 취미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 이야기들은 하나 같이 작고 개인적인 것들뿐이어서 구태여 귀를 기울여 듣지 않아도 좋을 것들이다. 하지만 하루키가 풀어놓은 문장들을 따라 가다 보면 어느새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연신 피식거리며 웃다가도 무언가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엿보게 된다. 돋보기를 들이대고, 팔짱을 끼고 어려운 이론 따위를 들먹이며 구태여 해석하지 않아도 삶의 작은 순간순간들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 보통의 우리는 결국 그 작은 순간들 속에서 웃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하루키는 무엇이 되라거나,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제안하거나 넌지시 자기의 뜻을 피력하지도 않는다. 그는 단지 그의 삶을 가만히 풀어놓고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자, 당신도 와서 구경하라구. 별 차린 건 없지만. 제법 괜찮은 인생이었으니까."
책장을 덮으면 다시 처음부터 읽고 싶어 지는 이야기. 몇 번을 되풀이해 읽어도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이야기. 하루키의 소설보다 하루키의 수필에 더 마음이 간다는 친구의 말이 이해된다. 삽화가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어설픈 듯 하지만 정겨운 삶의 냄새를 고스란히 풍기는 삽화도 이 책의 즐거움이다. 인생에 대한 회의에 빠진 사람에게 권한다. 이 책을 통해 최소한 그 회의 속에서 배영하는 법 정도는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추신 1 : 꼼데가르송의 정장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궁금한 사람은 필독!
추신 2 : 제발 언젠가는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일러스트를 제대로 살린 책이 나와주었으면... (읽고 있나 문사!)
2011. 5. 1. 두부를 넣은 라면을 먹은 뒤. 멀고느린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