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열, 표절, 타진요들의 시대

시사 읽기

by 장명진


#0 인트로


지난 1년 반, 연달아 선거를 치르는 동안 시대가 변했음을 느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진실이나 이상, 정의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기는 경험’을 원한다. 내가 속한 집단이 이기고, 상대를 무너뜨릴 수 있다면 그다음은 그다음의 일일 뿐인 것이다. 이는 어느 진영을 막론하고 대동소이했다. 무리에 들고, 무리가 이기는 것을 바라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소속 집단에 대한 강한 결속, 그 집단이 승리하는 기쁨의 절정을 희구하는 경향성은 2002년 월드컵, 그리고 촛불혁명으로 우리에게 더욱 특별히 각인되었다.


내가 촛불정부에 기대했던 것은 부디 그 강화된 집단성을 협력과 이해를 통해 해체하고 다양성으로 승화시켜내는 일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역사는 그 반대로 진행되고 말았다. 뭉치면 힘이 된다는 것을 경험한 이들이 유튜브와 SNS 등의 신매체를 선동수단으로 적극 활용해 다양한 분야에서 ‘무릎 꿇리기 게임’을 시작했다. 이들이 한 번 누군가를 무너뜨리자고 마음먹은 뒤라면 중요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 '승리'일뿐이다. 승리를 위해서는 사실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이들은 소규모전을 통해 경험했고, 게임의 참가자가 수십만에 이르러 ‘대중’이라는 가면을 쓰게 되면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양성과 공존의 시대가 아닌 ‘타진요들의 시대’에 도착했다.






#1 유희열의 가장 큰 오판


유희열 씨는 시대가 변한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거장의 대표작과 유사성이 도드라지는 작품을 굳이 발표한 것은 분명히 본인 스스로의 불철저함 탓이다. 이에 대해서는 두고두고 성찰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후 벌어지는 이른바 ‘표절시비’는 시대적 현상이다. 유희열이라는 도그마를 기어코 무너뜨리고 말겠다는 파편화된 집단의 ‘무릎 꿇리기 게임’과 유튜버-언론의 조회수 장사가 시너지를 일으켜 만들어낸 아주 낯익은 현상.


에픽하이의 천재적 싱어송라이터 ‘타블로’를 괴롭혔던 타진요(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 사건은 벌써 사람들에게 희미해진 것만 같다. 타진요가 사용했던 방법은 정치공작의 고전인 ‘메신저 때리기’였다. 메시지가 아닌 메신저의 신뢰도를 떨어뜨려서 메시지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타블로가 어떤 말을 해도 의심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도 고립시켰던 타진요


타블로에게 스탠퍼드 대학 졸업장 공개를 요청하고, 졸업장을 공개하면, 졸업장이 조작이라고 하고, 학교를 직접 찾아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하면, 관계자를 돈으로 매수했다고 하는 식으로 하나를 입증하면 다른 하나의 의혹을 곧바로 내밀며 100개 중에 단 1개라도 오류가 나도록 만드는 것이다. 1개의 오류가 발견되면 “자 봐라! 거짓말이 드디어 드러났다!”라고 하며 나머지 99개의 참도 거짓으로 퇴색시킨다. 합리성의 세계에서는 엉터리 같은 짓이지만, 대중은 특히 연예인과 정치인에겐 매우 비합리적이다.


유희열 씨는 류이치 사카모토 본인에게 실수를 사과하고 화해하면 모든 일이 끝날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이 시대의 어떤 대중들은 ‘진실’이 아니라 ‘승리’를 원하고 있을 뿐임을 간과한 것이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진실’ 일뿐이라고 말한다. 진실에 대한 데이터들은 전혀 수용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2 표절은 썸네일 스티커가 아니다


‘표절’이란 표현은 유튜버와 언론들이 조회수를 위해 아무렇게나 썸네일에 붙여도 좋을 어휘가 아니다. 작품 자체의 단순 유사성뿐만 아니라, 맥락, 정황, 의도, 본인 및 주변인 진술, 표절 대상이 된 창작자의 의견 등 여러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결론을 내려야 한다.


90억 인구 중에 예술가는 얼마나 될까. 최소한 1천만 명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천만 명이 생산하는 작품의 수는 세계 인구를 아득히 뛰어넘을 만큼 많을 것이다. 18세기 즈음까지만 해도 세계 인구는 10억 명 남짓이었고, 창작자는 희소하고 희소했기에 예술가들이 저마다의 독창성을 뽐내기가 어렵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지금은 음악으로 한정해도 르네상스 이후 쌓인 창작 음악의 데이터가 포화상태다. 기존에 사용된 음계를 모두 피해서 만들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내가 고유하게 만든 멜로디와 리듬이라도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가 이미 사용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따라서 오직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창작자라면 김태원 씨처럼 새로 나오는 음악을 하나도 안 듣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세계의 모든 음악을 섭렵하고 기억해서 어떻게든 그와 다른 것을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물론, 그 다름이 대중의 공감을 얻을지는 미지수다.


맥락이 전혀 다른 내용을 아무렇게나 가져다가 편집하고, 조회수 장사에 활용하는 유튜버들


20세기 이전에는 자연과 사람의 삶이 예술의 재료가 되었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이미 대중예술과 사람의 일상이 서로 결합되어 앞서 창작된 예술 그 자체가 다음 예술의 재료가 된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요즘 젊은 만화가들은 사람을 직접 보지 않고, 만화 속 사람을 보고 만화를 그린다는 맥락의 하소연을 했다고 한다. 조금 아쉽지만 이미 그런 세상이 되었다.


영화 <설국열차>가 개봉되기 2년 전에 나는 <모두 그린란드로 간 걸까>라는 장편소설을 알라딘 창작블로그에 연재했었다. 세기말 인류가 전염병으로 멸망한 상황에서 유일한 희망인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지구 유일의 청정지역 그린란드로 향하는 주인공 일행의 이야기를 다룬 근미래 SF 소설이었다. 그 소설의 여주인공 이름은 ‘요나’였고, 마지막 빌런은 열차 안에 존재했다. 나는 영화 <설국열차>가 내 소설을 표절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결론은 ‘없다’이다. 일부 놀랍도록 유사한 점이 있지만, 실제로 보면 전혀 다른 작품이기 때문이다. 법원에서 대부분의 ‘표절 소송’이 실패로 끝난다. 그냥 보면 비슷해 보여도 꼼꼼히 따져보면 결국 다른 작품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 억울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3 독창성이란, 비슷한데 다른 것


현대예술은 온전한 독창성의 대결이 아니라, 한 끗 차이 심미감의 대결이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창작자라면 평생 표절 소송만 벌이다가 자기 작품은 제대로 생산하지도 못하고 인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내가 <모두 그린란드로 간 걸까>를 쓸 때, 참고한 것은 내 유년을 사로잡았던 마쓰모토 레이지의 만화영화 <은하철도 999>와 <성경>이었다. 영화 <설국열차>는 아시다시피 1970년에 프랑스에서 창작된 자크 로브와 알렉시스의 그래픽노블이 원작이다. 서로 다른 것을 바탕에 두고 그림을 그렸지만 비슷한 그림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 그림은 비슷할 뿐 결코 똑같지는 않았다. 관객과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심미감과 주제의식 또한 차이가 분명했다.


많은 표절소송의 최종 단계에서 ‘사실상의 표준’과 ‘필수장면 이론’ 등을 모두 배제하고 나면, 결국 ‘심미감’에 이른다. 이 창작품이 수용자에게 불러일으키는 미적 감흥이 동일하다고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서로 다른 심미감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은 유사한 소재를 사용한 서로 다른 창작물로 여겨지는 것이다.


DOYO 작가의 콜라주 작품


미술계는 이미 오래전부터 콜라주 기법이 창작의 주요 기법으로 자리 잡았다. 자연을 재료로 삼던 것에서, 적극적으로 창작물 그 자체를 재료로 삼는 시대로 일찍이 전환한 것이다. 콜라주는 모두 남의 작품을 가져다가 재배치를 할 뿐이지만 그 자체로 고유의 작품이 된다.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모나리자의 얼굴을 빨갛게 칠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창작품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예술의 현주소다.





#4 표절 판정은 법정의 일


타진요들의 조회수를 올려주고 싶지 않았지만, 글을 쓰기 위해서 유희열 씨의 표절 의혹을 제기하는 유튜버들의 음원 비교 영상을 대부분 시청했다. 내 결론은 모두 결국 서로 다른 심미감을 불러일으키는 별개의 고유 창작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소송을 건다고 해도 법원은 나와 같은 결론을 내릴 것이 자명하다.


법적 사실이 아닌, 창작자의 도덕성을 다투고자 한다면 의혹 제기자들은 음원 비교 영상이 아니라 정황 증거를 제시하거나, 창작 당시 주변인의 진술을 받아오는 것이 합당하다. ‘의도성’을 전혀 증빙할 수 없는 막무가내 표절 주장은 타진요식 ‘무릎 꿇리기 게임’에 대한 의구심을 키울 따름이다.


과거 신경숙 소설가의 표절 논란 때도 우리 사회는 ‘표절’의 경계를 제대로 긋지 못했다. 이번 유희열 음악가의 표절 시비는 그 유예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는 구절 등 몇몇 구절과 표현의 유사성이 한 소설을 다른 소설의 표절작으로 정의 내리게 할 수 있는 것인지? ‘기쁨을 아는 몸’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문장이 다르다면?


신경숙 표절 논란에서도 사실 동일한 문장은 하나도 없었고, 이 대목이 작품의 심미감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부분인가도 쟁점이다. 이 건이 법정으로 갔으면 표절을 확정하기 어려웠을 것


대중가요로 치면 최호섭의 <세월이 가면> 노래 중 “세월이 가면~”이라는 유명한 다섯 음절은 영원히 그의 소유이고, 다른 창작자들은 이 음의 배치를 사용할 수 없는 것인지? 마찬가지로 “세월이 가면~”이라는 한 부분을 빼고 다른 모든 부분이 다른 노래가 있다면 그 노래는 표절인지 아닌지? (아마도 대부분의 대중은 표절이라고 생각할 것이지만 법적으로는 표절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창작물의 절대량이 많아지면서 발생한 이 대혼란을 정리하기 위해 법이 정해진 것이고, 매우 까다로운 종합적 판단을 요하기에 이를 실제 저작권 피해자의 고소가 있을 때야 이 문제를 법정에서 다루는 것이다.





#5 쿨한 예술소비자가 되는 법


따라서 21세기 예술소비자의 입장에서 표절 의혹을 정리하는 가장 쿨한 방법은 A작품과 B작품의 유사성을 우연히 발견했을 때, 각 창작자 혹은 관계자에게 그 유사성을 제보하고 창작자들끼리 협의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합의를 하든, 고소를 하든 둘이 알아서 정리할 것이다. 그런데 그 선을 넘어 의도성 여부를 판단할 근거도 없는 상황에서, 집단의 힘을 이용해 한 사람을 여론으로 매장시키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진실이나 정의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유사한 재료로 다양한 음식을 만드는 것에 우리는 아무 거부감이 없다. 축구선수들이 비슷한 기술로 다채로운 상황을 펼쳐내는 것을 우리는 즐긴다. 그런데 왜 예술에 있어서는 그 재료의 유사성에 과도하게 붙들려 있는 것일까. 결국 재료를 도용해서 ‘누군가 부당하게 돈을 벌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 분들에게는 ‘돈과 인기’는 재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한 작품이 최종적으로 만들어내는 ‘심미감’에서 나온다고 말하고 싶다. 특히 음악의 경우 멜로디, 리듬, 편곡, 구성, 가사, 가창자 등 여러 복합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단 하나를 바꿈으로써 심미감이 크게 훼손될 수도, 크게 개선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은 한 끗 차이 승부다.


번역과 리메이크, 편곡은 창작이 아니라고 여길 수 있지만, 실제로는 이 모두 창작의 일부다


말 그대로 고스란히 베낀 것이라면 그것은 논쟁의 필요성 자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A와 B가 조금이라도 다르고, 그 차이가 심미감의 큰 격차를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이미 별개의 창작이라고 봐야 한다. 들국화의 ‘사랑한 후에’와 심수봉의 ‘백만 송이 장미’는 모두 외국곡의 번안곡이지만 원곡을 들어보면 같은 곡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들국화와 심수봉의 노래가 압도적으로 좋다. 그것이 바로 심미감의 차이고, 그 차이가 현대예술의 변별점이자 독창성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대중예술의 성장은 이미 구성된 재료를 지키는 싸움을 통해서가 아니라, 유사한 재료라도 새로운 심미감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다양한 실험을 용인하는 것을 통해 이룰 수 있다. 예술인의 처우나 실제로 기업과 정부를 상대로 한 계약에 있어서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저작권이 누군가를 보내버리는 데에는 이토록 강력한 이 현실이 개탄스럽다. 정말로 예술을 사랑하는 소비자라면 표절 시비에 쏟는 그 엄청난 열정과 집단의 힘으로 ‘예술인 기본소득’이나 주장해주면 좋겠다. 뭐, 그런 건 또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하시겠지만.


2022. 7. 22.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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