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를 좋아하세요... / 다시 사랑이 오지 않아도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by 장명진


다시 사랑이 오지 않아도


“그녀는 전축을 열고 음반을 찾아보았다. 이미 외우고 있는 바그너의 서곡이 있는 음반의 이면에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브람스의 콘체르토가 있었다. 로제는 바그너를 좋아했다. … 그녀는 브람스의 콘체르토를 듣기 시작했다. 그녀는 첫 부분이 낭만적이라고 여겼지만 음악 중간에는 듣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음악이 끝나고 난 다음에야 그녀는 그 사실을 깨닫고 아쉽게 생각했다.”


- 86p


올해 초 건대입구역의 인덱스 서점에서 읽기 시작한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을 4월이 되어서야 마지막 장을 덮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매력적인 30대 후반의 여인 폴, 그녀의 오랜 연인 로제, 그리고 폴에게 달려드는 풋풋한 20대 청년 시몽의 교차하는 마음을 담담히 그려낸 작품이다. 인용한 대목은 이 소설이 가장 압축된 장면이다.


사랑은 늘 낭만적인 첫 부분으로 시작되지만, 중간 즈음에는 사랑의 감각을 망각하게 되고, 사랑이 끝난 다음에야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 이 세상이 끝나지 않고 모든 것이 빛을 잃지 않는다면, 당신의 사랑은 관계 속에서 어느 날 이미 조용히 끝나 있었던 것일 테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소진한 뒤에야 종지부를 찍고, 또 어떤 사람은 추억이 모두 불타기 전에 짐을 챙겨 사랑 속에서 빠져나온다. 무엇이 더 지극한 사랑일지 나는 여전히 가늠하지 못하겠다.


소설 속의 폴은 사랑의 잿더미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나간다. 그런 그녀에게 싱그러운 청년 시몽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을 던진다. 폴은 시몽도 브람스도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며 질문 자체에 골몰하게 되는 것이다. 눈물겹게도, 좋아하는 것을 좋아할 수 있는 시절은 그리 길지 않은 것만 같다. 어릴 적의 나는 하늘 위에 흐르는 구름을 하루 종일이라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10분만 바라봐도 딴생각이 들고 만다.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아름다운 줄 알았던 순간들은 빠르게 지나갔고, 이제는 아름다운 것들이 너무 많아서 그 무엇도 아름답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나의 정체성을 구성할 수 없게 된 나이에 도착한 것이다.


지구가 사라진다면 달은 궤도를 벗어나 우주의 망망대해를 떠돌게 될 것이다.
사랑은 서로에게 지구가 되어주는 일과 같다.


특별한 몇몇의 사람 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월 속에서 점차 투명해져 간다. 지하철 좌석 맞은편에 앉은 동년배의 누군가와 내가 다른 것은 무엇일까…. 사라져가는 자신의 자리를 명백히 하고자 우리는 관계를 애써 지킨다. 광대한 우주 속에서 자신의 좌표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익숙한 당신이 필요하다. 로제는 폴에게 자기 존재 좌표의 기준점이었으리라. 지구가 사라진다면 달은 궤도를 벗어나 우주의 망망대해를 떠돌게 될 것이다. 사랑은 서로에게 지구가 되어주는 일과 같다. 아무리 형편없는 지구라도 거기에 있어준다면 별의 중력 속에서 달은 달의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폴이 무책임하고 바람둥이인 로제를 떠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은 오은영 박사의 조언을 구하지 않아도, 누구라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 인간은 어리석은 채로 살고자 한다. 일주일 뒤에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인간을 비롯한 지구의 수많은 생명체들은 어리석은 월요일과 금요일을 보내고 말 것이다. 누군가는 혼신을 다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겠지만, 어쩌면 그 또한 그저 그가 살아오던 대로의 모습일지도 모를 일이다. 가늠할 수 없는 시공 속에서 사람이 정하는 옳고, 그름은 한 철 바람이나 물결과 다르지 않다.


4월의 가운데, 거리에는 봄이 가득하다. 형편없는 삶도 반짝 빛이 나는 계절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살아가고자 애쓴다. 선택한 죽음조차 삶의 의지다. 따스한 햇살이 키보드를 누르는 손가락 마디마디에 다정하다. 지금 내가 듣고 있는 음악은 고전으로 남은 ‘브람스’가 아닌, 유행이 지나버린 ‘유키 구라모토’이다. 유키 구라모토의 피아노 선율이 지금 여기에선 나의 지구이고, 존재의 중력이다. 이 순간을 살아가도록 하는 힘이다. 지구를 잃은 채, 아주 오래 캄캄한 어둠 사이를 떠돌던 달의 마음이 잠시 평온한 궤도를 찾는다. 다시 사랑이 오지 않는다 하여도, 오늘은 괜찮을 것 같다.


2022. 4. 17. 멀고느린구름.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새로운 시대의 기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