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류 도미닉 <블론드>
10대와 20대 시절을 살아내는 동안 나의 인생은 어쩌면 전생의 업으로 인한 저주가 아닐까 생각했다. 가족의 해체로 고아가 된 기분으로 살았던 10대와 무일푼으로 상경해 가난의 무게를 홀로 이겨내야 했던 20대의 20년은 그야말로 오직 존재하기 위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인기 드라마에서 펼쳐지는 컬러풀한 세상과 내가 살아가고 있는 잿빛 현실은 극명한 대비였다.
영화 <블론드>를 통해 마릴린 먼로, 아니 노마 진의 삶을 건너보며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갈색 머리칼의 ‘노마 진’은 금발 마릴린 먼로의 본명이다. 영화의 1막에서 불타는 집에 두고 온 호랑이 인형을 걱정하는 장면부터 나는 어느새 ‘노마 진’이 되어 <블론드>의 시간을 살게 되었다. 나 역시 유년의 외로움을 인형 친구를 통해 견뎌냈기 때문이다. ‘노마 진’이 되는 것은 그저 내가 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물론, ‘마릴린 먼로’가 될 수는 없었다. 나는 아직 전혀 슈퍼스타가 아니기에.
노마 진의 어머니는 정신이 망가져 딸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다. 아버지는 유년 시절에 본 한 장의 사진으로만 존재한다. 노마와 나의 삶에 내려진 공통의 저주는 ‘영원한 외로움’이었다. 가족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의 머릿속에는 ‘완벽한 가족’만이 자리한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소유하고 있을 그 완벽한 가족을 ‘나도 소유할 수 있다면’ 외로움이 해소되리라 믿는다. 모든 것을 가진 듯 화려했던 마릴린 먼로와 달리 노마 진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녀에게는 가족이 없었으니까. 노력했지만, 거의 잡을 뻔했지만 끝내 놓쳐버리고 말았으니까. 명성과 부, 대중들의 음흉한 시선은 오히려 인생의 저주를 더 돋보이게 하는 장치에 불과한 것이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저주라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약물이나 기타 중독적인 것들에 의존해 스스로를 파괴하거나, 흑화되어 희대의 빌런이 되거나, 그 모든 고통을 이겨내고 현자가 되거나. 아무튼 조용히 살아가기에는 곤란한 운명임에는 틀림없다. 내 삶에는 두 가지의 저주가 있다. ‘영원한 외로움’이 전생의 업이 부여한 것이라면, ‘너는 결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어’는 20대에 얻은 현생의 저주다. 이 두 저주는 별개의 저주인 것 같지만 서로 이어져 있다. 좋은 사람이 되려면 자기 자신 속의 근원적인 외로움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영원한 외로움’의 저주는 끝없이 나를 구원해줄 타인을 갈망하게 만든다. 이 두 저주를 동시에 해결하는 길은 오직 나로서 온전해지는 길뿐이다. 그 길은 아마도 슈퍼스타와는 정반대에 있는 고독한 수도자의 길과 같을 것이다.
영화 <블론드>는 육체의 빛에 가리워진 영혼의 어둠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마릴린 먼로의 육체가 아닌, 노마 진의 영혼에 근접할 수 있다. 모두가 아닌 다만 한 사람에게 그치지 않는 사랑을 받고, 진정한 가족으로 연결되기를 갈망했던 아주 보통의 영혼. 마릴린 먼로의 세 번째 남편이었던 극작가 아서 밀러는 그녀의 영혼을 끝까지 보살펴주지 못한 것을 평생의 회한으로 여겼다고 한다. 죽음이란 가능성의 종말이다.
노마 진은 36세에 세상을 떠났고, 나는 그보다 더 긴 생을 살아내고 있다. 아마도 빛이 훨씬 덜했기에, 그늘도 그만큼 짙어지지 않은 덕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제 나는 내 외로움을 덜어보고자 공연히 남에게 해를 끼치느니, 어떻게든 홀로 발버둥 쳐보는 것이 훨씬 낫다고 여긴다. 몇 가지 가벼운 중독증이 있으나 아직 나를 파괴할 정도는 아니고, 빌런이 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니, 결국 이렇게 정해진 수순처럼 수도자가 되어가는 것인가 싶다. 살아남은 내게 어떤 가능성의 시간들이 펼쳐질까. 언젠가 아버지가 용하다는 점술가에게 내 사주를 물었더니, 중이 되거나 셀럽이 되거나 둘 중 하나라고 했다고 한다.
아버지, 아마도 중이 될 팔자인 것 같습니다.
2022. 10. 5. 멀고느린구름.
P.S : 마릴린 먼로 속의 노마 진을 되살려낸 배우 ‘아나 데 아르마스’와 원작 소설가 ‘조이스 캐럴 오츠’에게 찬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