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영 <안나 : 감독판>
천오백여 년 전, 고타마 싯다르타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공(空)’이라고 하였다. 비어 있다고 하면 없다는 말과 똑같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空)은 무(無)가 아니다. 공이란 무와 유가 서로를 만들어내는 유무상생(有無相生)의 상태를 말한다. 쉽게 말해 있었는데 없었습니다, 없었는데 있었습니다의 세계가 곧 공의 세계라 할 수 있다. 고정된 실체가 없이 끝없이 변화하고 있는 세계, 그것은 현대 물리학이 깨달은 우주의 진실이기도 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입자들의 찰나의 접합일 뿐이다.
그 세계 속에서 사람은 ‘나’라는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간다. 이주영 감독의 드라마 <안나 : 감독판> 속 ‘안나’도 ‘최지훈’도 태어난 이상 자기 자신을 더 높은 곳에 두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세상이 온통 거짓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거짓에 발을 담그면 더 빠르게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어차피 부조리한 세상이므로 그 부조리의 일부가 되는 것은 이들에게 부도덕이 아니다. 그러나 그 치열함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를 좀 더 일찍 간파한 것은 안나였다. ‘나’를 더 높은 곳에 두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나, 봉우리에 다다른 것은 ‘성공을 다짐하던 시절의 나(유미)’가 아니다. ‘나(유미)’는 이미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수성가형 스토리를 지닌 인물은 매력적이다. 정치인으로서 특히 좋은 패다. 사람들은 어려운 시절을 치열하게 딛고 일어선 사람들이 같은 처지의 나를 공감하고, 구원해주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아주 일부의 특별한 이들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자수성가형 인물은 ‘무능’을 혐오하고, ‘실패’를 경멸한다. 더 어려운 조건에서 자신은 이뤄낸 것을 이뤄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몇 수 아래로 내려다볼 뿐이다. 성과를 위해서는 거짓을 진실로 바꾸는 것 따위 아무 마음의 거리낌이 없다. 대표적으로 이명박은 자수성가 스토리로 대통령이 되었지만, 아시다시피 그는 이미 오래전에 떠나온 자신의 고단한 과거에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통념과 달리 누군가가 살아온 궤적은 ‘지금의 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할 때가 많다.
감독판 <안나>에서 그려지는 ‘안나’와 ‘최지훈’의 모습은 정치적으로 특히 흥미로웠다. 지난 대선 시점에 떠돌던 풍문 속의 ‘김건희’ 씨와 ‘이재명’ 후보의 오묘한 콜라보를 보는 듯했다. 풍문의 진위 여부야 법이 검증할 일이고, 내가 주목한 것은 똑 닮은 그 욕망의 형태였다. 기후위기 속에서 인류는 성찰의 시간을 보내야 마땅하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욕망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20대 대통령 선거는 권력에 대한 욕망만이 뜨겁게 달아올라, 성찰과 공존의 메시지는 무력한 형편없는 선거였다. 그 후폭풍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현실에는 ‘유미’는 없고, 안나와 최지훈만 득시글거리기 때문이리라.
그저 변화할 뿐인 ‘공’의 세계에서 진실과 진심은 일부만 성공하고 대부분 실패한다. 그것은 거짓과 위선도 마찬가지다. 우주는 어느 한쪽의 손만을 일방적으로 들어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굳이 진실하고 진심을 다해야 하는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세계가 바로 ‘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나’를 아름답게 들여다볼 수 없다면 그 어떤 부도 지위도 명예도 결코 우리를 충만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도, 신도 나의 행복을 대신 만들어줄 수는 없다. 그래서 성자들은 세속의 성공에 눈을 감고, 오직 내 마음의 빛을 향해 눈을 뜬다.
그러나 우리가 다 성자처럼 살 수는 없다. 우리는 때로 안나처럼 욕망을 향해 질주하고, 어느 날은 유미처럼 공포에 질려 속죄한다. 특히, 이 욕망의 시대에는 특정 정치인들에 과몰입해 내 삶을 의탁하는 일보다 훨씬 더 필요한 일이 있다. 나를 파괴하지 않을 욕망의 경계선을 올바르게 긋고, 수시로 솔직하게 성찰하는 것. 성자도 아니고, 괴물도 아닌 보통 사람의 삶을 보다 아름답게 지켜내는 일. 그것이 우리의 최선이자, 최우선이 아닐까. 결국 세계는 보통의 사람이 바뀌는 만큼 바뀔 뿐이다.
2022. 9. 16. 멀고느린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