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준의 <안녕, 나의 소녀>
1997년은 내게 이상한 해였다. 나는 그 해에 고등학생이 되었고, 처음 문예부 부원이 되었으며, 드디어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랑에 빠졌다. 초등학생 시절 소꿉놀이를 하던 아이를 좋아하거나, 짝이었던 친구를 점점 흠모하게 된 일은 있었으나 사랑에 빠진 것은 처음이었다.
입학식 후 첫 등교일이었다. 새벽 어스름이 남아 있을 무렵 집을 나섰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 처음 발을 들이고 싶었던 것이다. 봄 햇살은 간지러웠고, 학교로 오르는 언덕길에는 신선한 바다냄새가 가득했다. 첫 등교생의 영광을 자축하며 교실 문을 열었다. 이런, 처음이 아니었다. 2분단 중간 즈음 하얀 블라우스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먼저 와 앉아 있었다. 마침 연한 황금빛 아침 햇살이 교실로 쏟아져들었다. 투명한 빛으로 가득한 교실 속으로 바다를 머금은 실바람이 새어들었다. 여학생이 살며시 고개를 들었고, 우리의 눈길이 서로 툭 부딪쳤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고, 서둘러 창가의 내 자리에 앉아 창 밖의 먼 바다로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내 눈 속에 바다는 없고, 방금 전 부딪친 여학생의 눈동자와 하얀 블라우스 교복만이 가득했다. 나는 알게 되었다. 이거구나. 이런 게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구나.
영화 <안녕, 나의 소녀>의 남주인공 ‘정샹’은 여주인공 ‘은페이’와 3년이나 단짝으로 지낸 모양이지만, 나는 위의 여학생과 단 3개월 남짓만을 함께 보냈다. 그럼에도 그 3개월은 내 인생에 긴 여운을 남겼다. 우리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먼 미래의 꿈을 서로에게 처음으로 말했고, 서로가 서로에게 첫 번째 팬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가끔 그 여학생을 떠올리며 기도한다. 부디 꿈을 이루었기를.
<안녕, 나의 소녀> 속 정샹은 그런 나보다 훨씬 적극적이다. 그것이 3년과 3개월의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사회인이 된 후에도 정샹은 꿈을 이루기 위해 멀리 이국으로 떠났던 은페이를 찾아 나서고, 실의에 잠겨 있는 은페이를 다시 응원한다. 은페이는 그런 정샹이 그다지 달갑지 않다. 저 높이 있는 꿈과 달리 비루한 현실은 점점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결국, 은페이는 38살에 꿈을 꿈으로 남긴 채 세상을 떠난다. 죄책감에 사로잡혀 거리를 배회하던 정샹은 부랑자 할머니로부터 받은 꽃의 기이한 힘으로 단 3일 동안 1997년의 결정적 순간 속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정샹은 어떻게든 은페이의 꿈을 조기에 좌절시켜, 먼 미래에 일어날 극단적 결론을 바꿔보려 노력한다.
사람의 삶은 꼭 꿈의 실현을 위해서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꿈의 실현을 위해 살아간다. 도무지 거리를 짐작할 수 없는 별을 향해 질주한다. 어떤 행운아는 단 며칠 만에도 꿈의 별에 도착하지만, 어떤 이는 수만 광년을 달려도 별에 닿지 못한다. 때로 어떤 이는 별에 도착했지만 곧 쫓겨나버린다. 꿈은 결코 공평하지 않다. 그럼에도 은페이는 끝끝내 꿈으로 향하는 인물이다. 마치, 그것이 자기만의 몫이 아닌 것처럼, 청춘 시절을 함께 했던 모두가 어느새 놓아버린 꿈이 온통 자기 어깨에 짊어져 있는 것처럼. 사람의 얕은 생각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은페이의 그 처절한 노력이 우주를 흔들어 정샹과 그의 친구들을 살아가게 만들었을지.
별을 향해 달리는 사람에게서도 아주 희미한 빛이 날까
김광석은 서른두 살에 죽었다. 정샹과 은페이가 사랑했던 대만의 김광석, 장위성 역시 서른한 살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두 음악가는 영원히 청춘인 채로 꿈의 별에 머물러 있다. 수많은 이들이 그 별이 내뿜는 빛으로 눈물을 닦고, 지친 몸을 일으키고, 다시 사람을 사랑한다. 별을 향해 달리는 사람에게서도 아주 희미한 빛이 날까. 그것이 충분히 밝지 않더라도, 고작 한 사람만을 밝힐 빛이라도 말이다.
“안녕, 나의 소녀.” 이것은 작별 인사가 아니다. 정샹 속에서 영원한 꿈의 빛을 내뿜을 은페이에 대한 안부 인사다. “안녕, 나의 소녀.” 이것은 1997년에 꿈을 나누었던 한 여학생에게 보내는 내 안부 인사다. 별을 향해 달리는 우리에게 아주 조그만 빛이라도 나서 단 한 사람이라도 밝힐 수 있다면, 비록 아직 꿈의 별에 닿지 못했어도 어떠랴. 빛나는 모든 것은 크건 작건 이미 별인 것을.
2018. 여름. 멀고느린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