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현 <나의 포근했던 아현동>
열여덟 살에 쓴 소설 <타인의 세상>은 내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 소설은 어린 시절 철거민이었던 청년이 재개발 현장에 철거용역으로 투입되며 겪게 되는 번민을 다루고 있다. 공교롭게도 그 소설이 전국 청소년문학상 대표작이 되며 내 삶은 재개발되었다.
유년 내내 달동네를 떠돌았던 내게 9시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재개발 현장의 아우성들은 실존적 공포였다. 잠을 자고 있는 집 벽이 허물어지는 꿈, 저금통을 털어 깐돌이와 치토스를 사러 가던 구멍가게가 포클레인에 짓눌리고, 가게 주인 할머니가 땅을 치고 통곡하는 꿈을 이따금 꾸었다.
학교 아이들 대부분은 내가 어디 사는지조차 알지 못했지만, 선생님들은 늘 연민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아주 어릴 땐 그 시선이 참 의아했다. 나는 내가 사는 동네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다. 조금만 걸어가면 숲이 나오고, 손을 뻗으면 하늘이 닿을 듯하고, 맑은 바람이 지나고, 밤이면 지상의 별들이 총총이 켜지며, 비밀스런 골목들 사이로 이야기가 생겨나는 높고 오래된 동네.
옛 아현동을 사랑했던 것은 내 유년의 동네와 닮아서였다. 서울로 올라와 늘 생활고에 시달리던 내게 믿을 것은 튼튼한 두 다리뿐이어서, 주말이면 서울 거리를 걸어 다니는 게 호화 여행이었다. 아현동을 발견한 것은 스물세 살 무렵, 인근의 보습학원에서 국어강사를 한 덕분이었다. 새벽 1시, 2시까지 초과수당도 없이 수업을 하고 캄캄한 밤길을 걸어 제기동 집까지 1시간을 걸어 퇴근하곤 했다. 아현동 골목길은 고단한 내 발길을 가만히 받쳐주었다.
학원 일을 그만둔 뒤에도 이따금 주말에 아현동을 찾아 골목들 사이로 언덕을 오르고, 가장 높은 곳에서 이화여대, 연세대, 홍대 일대의 거리를 내려다보는 걸 즐겼다. 훗날 영화 <동주>를 통해 윤동주 시인도 비슷한 운치를 즐겼다는 것을 알고 아현동 산책에 더 애정이 깊어졌다. 연남동으로 이사한 뒤, 집에서 아현동까지 걸어갔다 오는 일도 많았다. 그런데 그 무렵부터 재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더니 점점 내가 사랑하던 정경들이 사라져갔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아파트공화국 대한민국의 도시건축문화는 혁명이 일어나도 바뀌지 않을 것만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얼마 전 해방촌의 단골 서점 별책부록에서 <나의 포근했던 아현동>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견하고 구입했다. 어릴 적부터 아현동에서 쭉 성장했던 작가의 에세이다. 주워온 말들로 그럴싸한 위로를 늘어놓는 메인스트림의 에세이들을 싫어하는 내게 안성맞춤인 책이었다. 담백하면서, 진실한 삶이 깃들어 있고, 함부로 위로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온기를 낸다. 군밤을 데우는 작은 조약돌 같은 느낌이다. 특히, 각 편마다 군더더기 없는 마무리가 귀감이 되는 작품이었다.
조만간 시간을 내서 아직 남겨진 아현동의 조각들을 찾으러 가볼까 싶다. 내게는 ‘포근’까지는 아니지만 무척 ‘다정’했던 아현동, 비록 옛 아현동은 사라졌지만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2022. 11. 1. 멀고느린구름.
*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 윤동주 시 <사랑스런 추억>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