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하루의 이야기
카레라이스라면 자신이 있다. 대학생 시절에 모교 후문 쪽 반지하 커피점에서 파는 일본식 국물 카레라이스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바로 그 카레라이스를 국자로 10분 동안 휘젓고 있던 사람이 나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좀 기억해둘 필요가 있겠다. 그 카레의 맛은 뭐랄까 고라파덕의 눈빛 같은 맛이었다. 별 뜻 없지만 묘하게 인상에 남았다. 나 역시 오래 그 맛을 잊지 못했다.
카레라이스에 다시 손을 대기 시작한 때는 강원도 철원에서 살던 시절이다. 커피점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지도 벌써 여러 해가 지난 뒤였다. 레시피를 기억할 리 없었다. 대강 당근, 감자, 소고기, 카레가 들어갔다는 것만 떠올릴 수 있었다. 나는 감자 알레르기가 있고, 어설픈 채식주의자였기에 벌써 흐린 기억의 레시피에서 절반을 빼야 했다. 대충 소고기는 버섯으로, 감자는 호박으로 대체했다. 채소를 볶았는지, 그대로 넣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서 뭔가 반만 볶았다. 거기에 적당히 물을 붓고, 약간 매운맛 오뚜기 카레 가루를 쏟고, 국자로 저었다. 국자로 젓는 부분만은 확실히 몸이 기억했다.
카레는 얼기설기 만들었는데 놀랍게도 정확히 고라파덕 맛이 났다. - 이런 말하면 좀 이상하지만 절대 고라파덕을 넣지 않았다 - 카레를 만든 그날이 어떤 날이었는지는 뚜렷하지 않다. 저녁 하늘이 연보라빛이었던 것만 떠오른다. 먼 연인을 그리워한 날이었나. 탈영병을 취재하러 나선 기자를 잡으러 간 일요일이었나. 내가 쓴 소설 문장에 눈물을 쏟았던 날이었나. 그것도 아니면 민통선 안 논두렁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오리들을 종일 바라본 날이었나. 그 어떤 날이었대도 그리 어색하지는 않겠다. 나열한 모두가 내 일상이었다. 아무튼 북극의 오로라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 색의 스펙트럼에서 보라색만을 뽑아 하늘에 펼치면 바로 그날의 보라빛 하늘이지 않을까 싶다. 덕분에 내 카레라이스는 그날로 고라파덕 맛이 나는 오로라색 카레가 되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나는 방문객에게 요리해주는 걸 즐기는 사람인데,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내 카레라이스를 선보인 적이 없는 듯하다. 고라파덕 맛이 나는 오로라색 카레는 그렇게 온전히 은둔의 요리로 남게 되었다. 어찌 보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방문객에게 어때? 확실히 고라파덕 맛이 나지? 라든가, 잘 보면 오로라색이 보일 거야 같은 말을 해서 내 평판을 떨어뜨리지 않아도 됐으니까 말이다. 과연, 모든 우연은 인생의 조화를 위한 필연일지도 모른다.
카레라이스를 내 소울푸드라고 소개하기엔 너무 이따금 먹고 있다. 아, 그날은 카레라이스를 만들어 먹었지 하고 정확히 기억할 정도의 빈도다. 하나만 더 소개하자면, 그날은 혼자 예술의 전당에 다녀온 날이었다. 겨울에서 봄으로 건너가던 시기였다. 아직 이른 오전이어서 전시장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의 사진을 질리도록 감상할 수 있었다. 당시 내 주된 업무가 사진을 찍는 일이었기에 그의 작품들이 더욱 인상 깊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서점에 들러 브레송의 사진집을 샀다. 오늘은 카레라이스의 날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트에서 카레 재료도 샀다.
해가 저물기 전에 집에 도착했다. 카레를 끓이기 시작했다. 찬 바람이 창을 세차게 흔들었다. 푸르게 멍든 하늘에 눈꽃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무인양품 시디플레이어에 재즈 음반을 걸었다. 아마도 반스 과랄디의 피너츠 음반이었을 것이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당근을 썰었던 기억. 발이 시려 물방울무늬 수면양말을 신고 있었고, 식탁 위에는 강아지 인형이 저녁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커다란 접시에 밥과 카레를 담아 자리에 앉았다. 벌써 서른이 넘었구나 싶었다. 외로웠다. 너무나 외로웠다. 창을 활짝 열고 그 겨울의 마지막 눈이 내리는 걸 봤다. 날이 밝으면 꿈이었던 것처럼 모두 사라져버릴 눈송이들이었다. 나의 20대가 그러했다. 30대도 그럴 것이고, 40대도 그러하겠지. 마음이 너무 허무해서 내가 투명해지다 사라질 것만 같았다. 아직 온기가 남은 카레라이스를 꾸역꾸역 먹었다. 그 덕에 반투명 인간 정도에서 멈출 수 있었다.
그날 오후의 카레라이스는 정말 맛있었다. 식후 커피를 내렸다. 홍대의 칼디라는 커피점에서 볶은 케냐 원두였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자 비로소 나의 색이 다 돌아왔다. 그리운 것들이 참 많은 저녁이었다. 모두 불러 모으면 오케스트라 단원 규모였다. 나는 첼로 연주자에게 가장 관심이 깊었다. 아니, 그이를 사랑하고 있었다. 눈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푹푹 내렸다. 나의 사랑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땐 그랬지.
2024. 2. 14.
*별 관련 없는 내 책 홍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