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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와 유방암에 대한 정보들을 찾아보았다. 어려운 말들이 많았다. 식이요법 같은 것들에 관한 글만을 따로 긁어다 미니홈피 일기장에 비공개로 모아놓았다. 매일 사과를 먹고 병이 나았다는 사람들의 글을 보고 생협에서 유기농 사과 한 박스를 엄마의 집 주소로 주문했다. 정보를 좀 더 찾아보다가 지쳐서 다른 기사들을 보았다. 청소노동자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는 기사를 유심히 읽었다. 그 후보에 관한 기사는 다섯 개도 되지 않았다. 유력 후보들은 입을 모아 노동자가 대접받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암 치료비가 없어서 병을 키우게 하는 일도 없게 하겠다고 했다. 그들의 말은 거짓말이 되거나 진실이 될 것이었다. 시간은 멈춰 있지 않았다. 결말을 기다릴 수 없을 이들도 있었다.
남자친구가 예고 없이 찾아와 초인종을 눌렀다. 분명히 학회 발표에 쓸 자료들을 정리해야 해서 만날 수 없다고 했었다. 남자친구는 과학사회학을 전공으로 박사 과정 중이었다. 나를 만난 것은 스위스의 여행지에서 였다. 작년 8월 스위스의 루체른에서는 음악축제가 한창이었고, 나는 스위스 관광가이드로서 남자친구는 스위스 루체른 대학의 유학생으로서 만났다. 가이드 일정을 마치고 관광객들이 여독을 푸는 사이 나는 숙소를 나와 로이스 강변을 걸었다. 남자친구는 유학시절 사귀던 여자친구의 성화에 떠밀려 음악축제를 보러 왔다가 사소한 이유로 결별에까지 이르게 되고 로이스 강변에 앉아 캔맥주를 들이키고 있었다. 우리는 이국의 로이스 강변에서 우연히 마주쳤고, 그날 밤 달빛은 잠이 들기에 지나치게 밝았으며, 청춘들은 언제나 외로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남자친구가 술에 취해 사소한 결별 사유라고 했던 것이 사실은 사소하지 않았음을 안 것은 이미 우리가 모든 결정적인 순간들을 지나친 다음에서였다. 남자친구는 나와 밤을 보낸 다음 날 원래 여자친구와 극적으로 화해했고, 내가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그녀와 다시 동거생활을 지속하다가 유학생활을 마칠 때가 되어서야 최종적으로 그녀와 헤어졌다. 귀국해서는 다시 나를 찾았다. 나는 대체로 그 모든 과정을 오해하고 있었고, 처음부터 줄곧 우리가 사랑이라는 끈으로 견고하게 이어져 있다고 믿었다. 남자친구는 자신의 고독을 풀어줄 수 있는 여자라면 누구라도 좋을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그런 도움을 제공해주는 여자를 소중히 여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 역시 사랑이 필요했다. 여자를 사랑하지는 못했으므로 남자를 사랑해야 했다. 남자친구는 유능했고, 번듯한 외모를 지녔으며, 양성적인 균형감이 있었다. 대외적인 매너를 훌륭하게 갖추었고, 문화적인 감수성도 동년배 남성들에 비해 뒤지지 않았다. 누가 보더라도 준수한 남자였다. 괴팍한 성적 취향과 알프스의 티틀리스를 오르내리는 듯한 조울증 증세는 감수해야 할 것이었다.
남자친구와 잠자리를 하고 속옷을 편안한 원래의 것으로 다시 갈아입었다. 웅크린 채로 뒤돌아 잠든 남자친구의 굽은 등을 바라보았다. 헤이리의 주차장에서 울고 있던 아기 고양이의 둥근 등이 떠올라왔다. 로이스 강에서 웅크린 채 맥주를 마시던 모습도 함께 따라왔다. 그때 나는 왜 말을 걸었을까.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의 감정, 그때 내가 입었던 옷, 머리 모양, 그날 안내했던 사람들의 얼굴. 나와 관련된 것들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고 그에 관한 것들은 선명했다. 머리카락은 눈썹을 살짝 가릴 정도였고, 염색을 해서 연한 갈색이었으며, 푸른 블레이저를 입었고, 바지는 밤색 면바지, 에드워드 그린 브랜드의 검정 구두를 신고 있었다. 마시고 있던 맥주는 분명 버드와이저.
남자친구는 갑작스런 한낮의 이별을 토로하다가 이야기의 주제를 우주와 별들의 탄생으로 옮겼었다.
“우주는 137억 년 전의 대폭발 ‘빅뱅’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이제 웬만큼 배운 사람들한테는 상식이 되었죠. 하지만 그 빅뱅 이전에 일어났던 ‘인플레이션’이라는 갑작스런 우주의 팽창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아주 작고 작은 하나의 점.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점이 갑자기 10의 43 승배 크기로 확장되는 일이 일어난 겁니다. 1센티미터 크기의 물체가 플랑크 시간이라고 부르는 물리학적으로 가장 짧은 시간만에 돌연 은하 규모의 크기로 커진 거죠. 어째서 그런 일이 가능했는가. 아무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죠. 그건 그냥 그렇게 일어난 일이에요. 마치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헤어지게 되는 일처럼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죠. 그래서 저는 이 우주가 시작된 사건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러브스토리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러브스토리의 결말로 수많은 은하단과 그 속의 은하, 그 은하들 중의 우리 은하, 태양계, 그리고 창백한 푸른 점이 잉태된 것이니까요.”
그러면서 남자친구가 풀어놓는 태양계 속에 자리한 아홉 개의 행성과 60여 개의 달에 관한 이야기는 끝도 없는 항해로로 내 마음을 떠밀었다. 어느 지점부터인가 나는 키를 놓았고, 노를 버렸다. 남자친구가 황급히 떠나간 호텔 침대 위에 누워서 아침 햇살을 맞았을 때는 먼 우주를 유영하는 보이저 1호가 된 기분이었다. 돌아올 수 없는 길을 혼자 걷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불안감. 남자친구는 보이저 1호는 인간이 만든 것 중에서 지구에서 가장 멀리 가 있는 물체라고 했다. 보이저 2호가 뒤를 따르고 있지만 둘은 아마도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거라고도 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문득 에덴 동산의 아담과 이브를 떠올렸던 것 같다. 시차를 달리해 태어난 두 성별의 인간은 어쩌면 1977년 8월과 9일에 각각 우주로 쏘아 올려진 보이저 2호와 1호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은 아닐까. 에덴에서 태어난 아담과 이브는 에덴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생명체인지도 몰랐다. 신은 인간만을 에덴에서 추방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었다.
남자친구는 고단했는지 계속 코를 심하게 골았다.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보았다. 이토록 가까이 있다. 그러나 분명했다. 우리는 영원히 가까워질 수 없다. 벽으로 거리의 찬 공기가 스며들었다. 겨울은 점점 자신을 또렷하게 드러냈다. 스탠드 불빛을 약하게 바꿔 어둠에 몸을 감췄다. 남자친구가 붙여준 야광별이 천정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북두칠성 자리를 그리고 있다. 남자친구에게는 엄마의 일을 이야기하지 않기로 정했다. 위로받거나 위로받지 못하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어느 쪽도 바라지 않았다. 남자친구가 더 나쁜 사람이 되거나 더 좋은 사람이 되거나... 어느 쪽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지금의 모습으로 머무르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종내에는 헤어질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 역시 이런 사람이었다고, 이런 사람이었기에 헤어지는 게 맞다고 마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변수가 생기지 않기를 그의 머리를 다시 한 번 매만지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