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픽사 영화는 꾸준히 챙겨 봐 왔기에 이번 영화도 개봉하고 바로 챙겨 보러 갔다 왔다. 늘 픽사 영화에는 후한 편이고 조금 아쉬워도 별점을 많이 주지만 이번 영화는 아쉬움 없이 별 다섯 개를 줬다. 요즘같이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영상물이 흥행하는 분위기에서 기본적인 물질들이 서로를 순수하게 위해주는 이야기라니 감동할 수밖에. 사랑 이야기에 감동을 받기도 했지만 그 외에 엠버의 삶이 예상치 못하게 큰 공감을 줬다. 부모님 밑에서 늘 말 잘 듣는 딸로 자라다가 난생처음으로 자신이 바랬다고 믿었던 목표가 실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모님을 위해서 만들어진, 굳은 목표라는 걸 깨달았을 때 이 영화가 내게 더 큰 의미가 될 거라는 걸 직감했다.
감정은 참다 보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맘 속에 응고가 된다. 그건 자신도 모르게 굳어져서 보이지 않는 내면에 차곡차곡 쌓이다가 불쑥 목구멍 밖으로 터져 나온다. 엠버는 아빠의 가게에서 혼자 일 할 때 소위 말하는 진상 손님들을 대하다가 무언가 자꾸 욱하는 걸 참을 수 없어 지하실로 뛰쳐내려가 크게 불을 내뿜는데, 나는 이게 내가 가끔 겪는 제어할 수 없는 감정의 폭발과 닮은 걸 느꼈다. 그냥 어쩌다 내 심정과 비슷한 대사를 하는 인물을 보고 눈물이 터지고, 하루가 끝난 후 집에 돌아와서 아무도 없는 방에서 괜히 날뛰고 싶고, 원치 않는 것들을 잔뜩 안겨주고 싫은 티를 낼 수도 없게 서운하다고 하는 부모님을 떠올릴 때 갑자기 모든 걸 갖다 버리고 싶고. 엠버는 나에게 그랬던 나날들을 떠올리게 했고 그 감정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 위로도 되었다. 이대로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이 정도면 말 잘 듣는 딸이지 싶다가도 가끔은 완전히 이해받긴 어려울 것 같은 답답함. 그 모든 감정을 담을 수 있는 캐릭터가 불이라서 더욱 좋았다. 뜨겁고 터지기도 하고 다루기 어려운 성질이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한 캐릭터의 복잡한 감정을 너무나 직관적으로 잘 표현해 주고 조금만 보고 있어도 금방 동화가 되어 그 캐릭터처럼 사고하게 되는 게 참으로 놀라웠다. 어쩜 이렇게 캐릭터를 잘 고르셨을까? 하고 영화를 보고 나서 여운을 곱씹다가 감탄했다.
그래서 웨이드를 봤을 때, 엠버를 관찰하면서 공감했던 것처럼 이 캐릭터를 보며 부러움을 느꼈다.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그의 성격. 살다 보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아, 나는 이렇게 속으로 자주 욱하고 겉으로는 꽤나 착하게 보이려고 애쓰지만 속은 좀 엉망이기도 한데 내가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그러다 보면 그냥 포기하고 삶을 사는데 집중하게 되는데 요새 들어 웨이드 같이 충분하게 솔직하고 감정 표현이 풍부한 캐릭터들을 만나게 되면서, 내 오래된 고민에도 작은 틈이 생기고 그 안으로 이런 캐릭터들의 감정이 물처럼 밀려들어온다. 아주 기쁠 때 남의 눈치를 생각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고 슬픔이 찾아올 때도 그 감정에 깊게 젖어들어 쏟아낼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약해 보이지 않으려 애쓰지 않고 여린 감정을 다 표현하는 건 강점이다. 늘 그런 캐릭터, 사람들은 내 마음을 약하게 하고 외면하고 있던 상처를 두드리니까.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나는 조금 더 정제하고 나를 덜어내려고 노력하는데 웨이드 같은 캐릭터를 보면 타인에게 나를 다 드러낸다는 건 순진한 게 아니라 되려 당당한 거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극 중에서도 손을 잡는 걸 두려워하는 엠버에게 먼저 괜찮다고 하며 손을 내밀고 너의 빛이 일렁이는 모습이 좋다고 하며, 엠버가 자신의 두려움이나 부모님의 고생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그에게 심한 말을 했을 때도 엠버를 구하기 위해 달려오는 모습들 모두 실은 그가 아주 용감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잘 울고 잘 감동받기에 약해 보이지만 그만큼 솔직하기에 아끼는 이 앞에선 용감해질 수 있다. 저번에 정서경 작가님이 나온 토크쇼에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취약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너무 예전에 봐서 정확한 문장은 아니지만)라는 말이 나왔는데 웨이드는 사랑한다고 말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취약점을 드러내는 데 겁을 내지 않는다는 건 얼마나 강하다는 얘기일까. 저 말을 하는 순간부터 상대에게 주도권을 줄 수도 있는데 오히려 웨이드는 이 말을 한 순간부터 더 단단해 보였다. 물론 그는 물이지만 말이다.
각자의 다른 점으로부터 배워가고 조금 데이면서 이뤄가는 게 사랑 같다. 그리고 인생이기도 하고. 나와 다르니까 전혀 이해해 주지 못할 거야, 나와 다르니까 넌 모를 거야 하는 마음의 벽을 허물고 새로운 걸 채워가는 과정 자체가 의미가 있기에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어렵고도 귀한 사건 같다. 매번 이런 영화를 볼 때마다 조금 더 강한 사람이 되어야지, 조금 더 솔직해져야지 하고 다짐하게 되지만 나도 내 일로 닥친다면 엠버처럼 상대에게 화상을 입힐지도 모른다. 이미 내가 웨이드 쪽이 아닌 건 사는 내내 느끼고 있었으니 그런 사람들처럼 상냥하고 부드러운 강함을 가질 수 있도록 나아가야겠지. 이런 영화를 또 살면서 만나게 되어 행운이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 이어 다정함의 의미를 알려주는 영화 덕분에 오늘도 조금씩 감정에 친숙해지고 있다. 감정을 드러내는 게 낯설지 않도록, 그게 약점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살아가야겠다. 그러다 보면 사랑도 꿈도 더 잘할 수 있겠지. 영화는 주로 사랑에 대해 다뤘지만 엠버가 꿈을 찾아가는 과정도 내게 가르침을 줬다. 감정처럼 꿈을 드러내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지만,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 맞이할 다음 세상을 위해 꼭 시도해봐야 한다. 내 자신에게 솔직해지기를 외면하지 말아야겠다. <엘리멘탈>이 두 원소의 어우러짐과 로맨스를 초점으로 나에게 다가왔지만 삶을 대하는 방식도 내게 큰 울림을 줬다.
처음 쓰는 긴 리뷰라 어수선하지만.... 좋았던 점을 표현하다 보면 여러 가지를 어떻게 하면 한 번에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자꾸 우수수 글자를 쏟아내게 된다. 곧 한 번 더 보러 갈 예정인데 지금 쓴 이유도 그전에 <스파이더맨 :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를 보러 갈 예정이라 감상이 섞일까 봐 <엘리멘탈>에 대한 감상이 저 멀리 떠밀려가기 전에 최대한 꾹꾹 담아서 써 내렸다. 감정 표현에 서툴고 자신의 삶을 다루는데 겁이 났던 사람이라면 꼭 한 번 보길 추천한다. 따뜻하게 차오르면서도 바다처럼 상쾌하게 맘을 트이는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