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겐 지나가면 그만인 여름
정말 오랜만에 평론이다. 사실 그동안 본 영화는 많았다. 다만 다른 곳에 에너지를 쓰느라 바빴고 로그인을 하는 걸 깜빡하다 보니 계속 방치하게 됐다. 그런 와중에 오랜만에 쓰게 된 평론. 자칭 씨네필치고 독립 영화를 안 본 지 조금 되었고 하루에 한 개씩 영화를 보던 것도 잠깐 잊었다. 이래서 삶이란 게 참 무섭다. 원래 좋아하던 걸 자꾸 뒤로 미루게 한다. 아무튼, 그렇게 밍숭맹숭해지던 나를 영화관에 데려가 준 친구 덕에 <여름이 지나가면>을 볼 수 있었다. 아무런 정보 없이 보러 가는 걸 좋아해서 좌석에 앉기까지 아무 생각 없이 설렜고 영화 중반을 보면서 ‘아차, 독립 영화를 볼 만한 멘탈과 심적 여유를 준비하지 않았는데’하는 후회도 조금 있었다. 나는 여운을 느끼려면 체력이 필요하다. <거인>을 볼 때도 큰 맘을 먹었고 <혼자 사는 사람들>을 볼 때도 찜한 목록에서 그를 클릭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그런데 그런 시간 없이 앉았으니, 이 영화는 내게 더욱 큰 여운과 감정을 줬다.
농어촌 전형을 노리고 이사 온 가족이란 설정은 한국이라면 그럴 법했다. 일단 입시가 가장 큰 축이 되는 학창 시절. 어떤 아이와 노는지가 마치 인생을 좌우할 것 같은 어린 시절. 그 시점, 자아가 가장 연약한 시절에 주인공 기준은 새로운 형제를 만난다. 딱 보기에도 방치된 아이 둘. 동생인 영준은 아직 천진하고 때론 그만큼 일탈에 잘 물드는 성격이었고 형인 영문은 이미 세상에 내처지게 되면서 아이다움을 잃은 지 오래였다. 남자아이들이라면 해볼 법한 일탈이 이 영화에 가감 없이 나타난다. 삥 뜯기, 자전거 훔치기, 서열 정리를 위한 싸움과 일방적 폭행 등등. 여자아이였던 나로서는 꽤나 쓸데 없고 원초적이었지만, 그들의 세계를 엿보는 재미가 있었다. 가끔 교실 뒤편에서 키스할 것처럼 으르렁대던 애들이 좀 더 날을 세우고 나쁨에 물들면 이렇겠구나 싶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아직 초등학생들의 이야기라 더 엇나간 일탈의 고통을 보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었다.
기준은 아주 평범한 남자애다. 소위 힘 센 형이랑 어울리고 싶고 그 형 처럼 되고 싶어하는 아직 평범한 남자애. 일부러 욕을 쓰고 거친 성격처럼 자신을 꾸미고 싶어 하는 연약한 자아를 가진 남자애다. 우선은 자신이 접근하기 편한 천진한 동생의 마음을 사고 그 후에 그 형이 좋아할 만한 걸 ‘조공’하는 점도 자연스럽게 연출되어서 공감이 갔다. 학창 시절, 선배들에게 무언갈 바치면서 인맥을 자랑하던 노는 애들이 떠올라서 조금 웃겼다. 하지만 영화가 주인공의 동경에만 초점을 맞췄다면 그저 그런 일탈 영화였겠지만, 그 와중에 보이지 않는 선 긋기, 그리고 주인공은 몰랐던 그에게만 제공된 울타리가 영화 내내 은은하게 언급이 되어서 형제들과 주인공이 느낄 불편한 거리감이 생생했다. 아직 영준은 모르지만 이미 어른들에게 많이 실망하고 소외 당하던 영문은 고요하게 분노하던 ‘쟤네 같은 애들’ 취급이 내 마음도 무겁게 하였다. 이제는 어른이 된 나도 영화를 보면서 ‘저런 애들은 어떻게 해줘야 할까?’ 고민했지만 뾰족한 해결책이 생각나진 않았다. 기관에서 돌봐주는 게 최선이겠지만 가끔 그걸 틀처럼 느끼는 애들에게, 그게 사실은 너를 지켜 줄 안전망이란 걸 어떻게 이해시켜 줄 수 있을지 영화를 보는 내내 고민도 해보았다. 동정을 받고 싶지 않은 마음 닫힌 사춘기 애들에게 다가가는 건 어렵다. 그들이 택할 쉬운 길은 너무나도 순차적으로 그들의 인간성을 조금씩 떼먹을 수 있어서 말리고 싶지만 그 친구들에겐 잔소리일 뿐이다. 멀리서 보면 쉽지만 그 순간에는 자존심이 더 중요한 순간. 그 사춘기의 까다로운 점이 이 영화에는 감정으로 느껴질 수 있도록 연출되어 있다. 기준의 아빠에게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돈을 받은 후 기준의 옆모습을 노려보던 영문의 모습, 한 마디 없이 평범한 애들처럼 게임 중인 기준의 옆모습을 한참 집중하는 컷에선 영문이 되어 그 감정을 느껴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땐 아슬하게 선을 넘을 듯 화를 내고 아닌 척 화를 거두는 장면에서도 영문이 얼마나 많이 그런 분노를 넘기는 법을 터득했는지 보였다. 아마 그때 보이지 않는 선을 타며 자존심이 무너지고 있었겠지. 영화에선 영문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순간과 그때마다 더 날카롭게 자신을 깎아가며 공격적으로 변하는 과정이 천천히 전개 되어서 여운이 깊었다.
기준은 ‘네가 쟤들이랑 같은 줄 알아?’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영문은 ‘우리 애랑 그만 놀아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기준은 영문의 선 안으로 들어가고 싶고 영문은 기준의 선 안이 자존심 상한다. 그리고 기준은 어른들이 그어둔 선을 영문보다 느리게 알아차린다. 영문처럼 되고 싶지만 중요한 순간, 결국 부모님의 품으로 돌아간다. 아마 내심 안도했지만 그런 자신이 부끄러웠을 거다. 영문처럼 되고 싶어서 선을 넘다가도 무서움을 느낄 땐 자신이 먼저 선을 그었을 때,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의 ‘엄마’처럼 비겁하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영문에게 줬던 플스 게임기는 잠시나마 그들을 이어준다 생각했지만 결국 그 게임기를 놓아줬을 때, 기준은 영문과의 여름이 끝났음을 직감했을 거다. 허세 빼면 시체인 남자애로서의 연기는 멈추지 않았지만, 되려 나는 부모님이 있어 다행이라 여겼을 거다. 영문과 영준이 탄 오토바이와 기준이 탄 부모님 차가 서로 다른 방향을 갈 때, 기준은 새로운 자신의 여름으로 가지만 두 형제는 계속 방치된 여름을 돌고 돈다. 기준에게는 한 때의 일탈이지만 영문과 영준에게는 삶인 시간들. 그 간극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중고등학교를 진학하고 학원에 치이고 수능을 준비할 때쯤, 기준은 영문을 잊어버리거나 아니면 ‘그 형은 여전히 거기 있나’ 싶겠지만 그것마저 아찔한 추억의 조각일 뿐이다. 영문처럼 아무도 모르는 모서리에 갇힌 듯한 시간은 아닐 거다. 누군가에게 무서운 형, 피해야 할 아이였던 영문이 어떤 어른이 될지는 그 누구도 궁금하진 않을 것처럼.
여담으로 친구 덕에 GV도 봤다. 실제 배우들도 볼 수 있어서 설렜고 신선한 경험이었다. 질문은 하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질문으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어서 좋았다. 요즘 한국 영화 침체기인데 배우들이 잘 자라서 충무로 공무원이 되어주면 좋겠다. 나도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해서 누군가와 내 작품에 대해 얘기할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그런 두근거림을 깨워준 좋은 시간이었다. 좋았다 좋았다 남발이지만…. 요즘 내 삶이 너무 단조로웠어서 이만큼 새로운 일이 드물었다…. 다음에도 GV를 가서 영화력을 키워야지. 간만에 재밌는 컨텐츠를 찾아서 들뜰 수 있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