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이 사랑, 통역되나요?》를 보고 -
※ 주의: 이 글에는 작품의 결말이 모두 담겨 있으니, 드라마의 마무리를 확인하고 싶은 분은 잠시 ‘후퇴’하셔도 좋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와 주로 생활하는 공간인 나의 서재 왼쪽 벽, 그곳에 걸린 필사의 구절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서유미의 소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의 한 대목이다.
“아무리 가깝고 사랑하는 사이여도 모든 것을 같이 나눌 수도 알 수도 없다는 걸,
하루하루 각자에게 주어진 일들을 해나가다 가끔 같이 괜찮은 시간을 보내는 게
‘인생’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모두 집을 떠나 적막한 공간에서 생활하는 요즘의 우리 부부에게 정확히 들어맞는 말이란 생각에 일부러 찾아 필사한 글이었다. 그런 우리가 요즘 함께 본 드라마가 넷플릭스의 《이 사랑, 통역되나요?》였다. 평소 우울하고 어두운 스릴러를 보고 나면 반드시 달달한 것으로 ‘콘텐츠 식단 조절’을 한다는 나만의 원칙에 따라 고른 작품이었지만, 이 로맨틱 코미디는 예상보다 훨씬 묵직한 삶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드라마의 주인공 차무희는 촬영 중 추락 사고라는 물리적 충격을 겪은 뒤 톱스타가 되지만, 그 사고의 후유증으로 ‘도라미’라는 환영이 나타나는 망상 장애를 겪는다. 비평적 시각에서 볼 때, 도라미는 단순한 망상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진실—어머니의 비극적인 범죄—을 외면하기 위해 스스로를 오역해 온 무희의 ‘내면의 감옥’이다.
그녀가 어색한 순간마다 아무 말이나 막 던져대며 횡설수설하는 것도 사실은 자신의 본심을 들키지 않기 위해 주변을 무의미한 텍스트로 가득 채우는 언어적 방어기제다. 그녀는 스스로를 오역하여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왔지만, 역설적으로 그 소란스러운 ‘아무 말’ 속에서 단 한 줄의 진심을 읽어내려는 통역사 호진을 만나며 비로소 자신의 비극을 ‘직역’할 용기를 얻는다.
여기에 통역사 호진의 서사가 겹쳐지면 이야기는 더욱 입체적으로 변한다. 그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닫힌 문장 속에 스스로를 가두었던 인물이다. 사랑에 빠지지 않겠다고 마음의 사전을 닫아버린 그에게 차무희라는 낯선 언어의 등장은 거대한 균열이었다.
하지만 사랑의 통역은 언제나 순탄치 않다. 호진이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어왔던 첫사랑의 그녀가 드라마 PD로 나타나자, 무희는 그들의 과거라는 텍스트를 현재의 위협으로 읽어내는 ‘상황의 오역’에 빠진다. 호진에게는 이미 갈무리된 추억의 갈피일 뿐이었으나, 무희에게 그 풍경은 자신과 호진 사이를 가로막는 견고한 벽처럼 의역(意譯)된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개입되는 순간, 우리는 눈앞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두려움과 결핍이라는 필터를 거쳐 타인의 진심을 오독하게 된다는 사실을 이 엇갈림은 여실히 보여준다.
누군가를 34년 동안 '직역'한다는 것, 그것은 상대의 서툰 문장을 교정하려 들지 않고 비문(非文)조차 삶의 한 페이지로 받아들이는 무한의 긍정이다. 알게 된 지 34년 된 나의 아내는 내게 단 한 번도 비난이나 부정, 좌절의 말을 한 적이 없다. 드라마 속 연인들이 과거의 망령이나 찰나의 풍경에 휘둘려 서로를 오해하고 엇갈릴 때, 그녀는 나의 삶이라는 텍스트 앞에서 한결같은 ‘직역’의 자세를 견지해 주었다.
만약 아내가 내 삶의 어긋난 조각들을 마음대로 의역하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장면들을 제멋대로 소설화했다면, 우리의 34년은 이토록 평온할 수 없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단편적인 정보에 흔들리지 않고 나의 본심을 끝까지 믿어준 그 무한한 신뢰야말로, 내가 세상이라는 거친 문장들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이었다.
드라마 속 통역사의 대사처럼 세상에는 사람의 수만큼 언어가 있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평생을 바쳐도 다 배울 수 없는 ‘타인’이라는 낯선 외국어를 기꺼이 공들여 습득하려는 다정한 열정일지도 모른다. 이 지점에서 드라마 제목은 우리에게 묻는다. '이 사랑, 통역되나요?'라고. 이에 대해 나는 나의 삶을 통해 답하고 싶다. 사랑은 화려한 '의역'이 아니라, 투박하지만 정직한 '직역'의 반복 속에서 비로소 오역 없는 진심에 도달하는 일이라고.
서재 한쪽 벽에 붓펜으로 꾹꾹 눌러 필사한 구절처럼 우리는 각자의 일을 해나가며 가끔 ‘괜찮은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하지만 그 시간이 이토록 평온한 이유는 서로의 존재를 오역하지 않겠다는 34년의 단단한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영원한 메이트이자, 곁에서 함께 드라마를 보던 그녀에게 이 부족한 번역의 글을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