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어쩔 수가 없다>를 보고 -
1997년 겨울, 그해의 바람은 유독 살을 에듯 시렸다. 평생을 바친 일터에서 하루아침에 내쫓긴 가장들에게 세상은 더 이상 안온한 보금자리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직장 상사의 곤혹스러운 표정이 해고의 신호였으나, 이내 우편함에 꽂힌 차가운 종이 한 장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사람들은 해고 통지서가 담긴 우편물 수령을 거부하며 필사적으로 도망쳤고, "며칠 쉬고 오라"는 회사의 권유가 사실은 영원한 퇴출임을 알기에 강제 휴가조차 공포가 되었다. 휴가에서 돌아와 마주한 것은 자신의 흔적이 말끔히 치워진 텅 빈 책상이었다. 그 상실감을 견디지 못한 가장들은 정장을 입은 채 산으로, 공원으로 스며들었다. 나무 사이에 텐트를 치고 숙식을 해결하면서도 가족에게 실직을 숨긴 채 생활정보지에 밑줄을 긋던 그 유령 같은 시간들. 아내가 펴 보인 손가락 세 개를 보며 남편은 ‘3개월’의 유예라 믿고 싶었으나, 사실 그것이 ‘3일’이라는 사형 선고였다는 서글픈 농담은 당시 한국 사회의 절박했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 수가 없다> 속 만수(이병헌 분)의 일상은 이 해묵은 공포의 2025년판 변주곡이다. 25년을 바친 제지공장에서 한순간에 밀려난 만수에게 직장은 단순히 생계를 잇는 수단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성채를 지탱하는 보루이자 자신의 정체성이 기록된 '종이' 그 자체였다. 정당한 경쟁으로 자리를 되찾을 수 없음을 자각한 순간, 만수는 경쟁자를 물리적으로 제거하려는 잔인한 계획을 시작한다.
옥상에서 다른 제지회사의 매니저인 선출(박희순 분)의 머리 위로 화분을 던지려다 망설임(이 망설임도 살인에 대한 가책이 아니라, 한 명 없애 봐야 별 의미가 없다는 데서 오는 실질적 계산에 의한 것이란 점이 더 섬뜩함) 끝에 포기하고 고추 화분 하나를 사 들고 온다. 이후 그 화분의 이름에서 따온 유령 회사 '레드 페퍼 페이퍼'를 세우는 순간, 그는 브레이크를 부수고 야수가 되기로 결심한다. 영화는 1997년의 공원 벤치에서 시작된 질문을 2025년의 기계화 자동화가 지배해 버린 공장 앞으로 끌고 와 우리에게 다시 던진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무슨 일까지 할 수 있으며, ‘어쩔 수 없다’는 방패 뒤에 숨어 어떤 일을 행해도 우리는 여전히 인간일 수 있는 것인가?
영화 속 만수의 계획은 황당하나 그 논리는 지독히 현실적이다. 타인의 기회를 박탈해 나의 생존을 도모하는 이 비정한 ‘가로채기’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대학교 등록 여부를 전화로 확인하던 초기, 지방의 한 대학에서 있었던 일이다. 후보 합격자 등록 여부를 묻는 상황에서 자신 앞 번호 후보자의 전화를 가로채 받아 "등록하지 않겠다"라고 허위 통보를 함으로써 자신이 대신 합격했던 사건이 실제 발생한 적이 있다. 이 사건은 결국 등록금 납부를 통한 절차적 증빙을 도입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지만, 그 본질은 영화 속 만수의 행위와 정확히 궤를 같이한다. 타인의 이력서를 찢고 그 존재를 지워내어 오직 나만을 위한 빈자리를 강제로 만들어내는 것. 만수의 사냥은 이 '전화 가로채기'가 가졌던 비겁한 욕망을 물리적 폭력으로 확장한 결과물일 뿐이다.
영화를 보면서 든 의문 하나. 왜 만수의 직업이, 그리고 그에 의해 하나씩 제거된 사람들이 하필 ‘제지맨’인가라는 것이었다. 종이는 인류 문명의 기록이자 개인 역사의 그릇이다. 그러나 디지털과 AI가 지배하는 시대 속에서, 종이를 만드는 이들은 역설적으로 ‘용도 폐기될 운명’에 처한 구세대의 초상이 된다. 평생 종이의 결을 어루만지며 자부심으로 버텨온 이들에게 종이(이력서)는 이제 나를 베고 타인을 찔러야 하는 비정한 병기가 된다. 만수가 자신의 온실 속에서 가상의 회사 ‘레드 페퍼 페이퍼’를 세우고, 응모자들의 이력서를 자신의 것과 대조하며 살인 리스트를 작성하는 장면은 이 역설의 정점이다. 생명이 자라나야 할 온실에서 종이를 미끼 삼아 사냥감을 유인하고 가장 우수한 종이(이력서의 소유자)를 골라 파괴하는 행위. 그 지점에 감독의 의도가 숨어 있다 할 것이다.
또한, 만수 자신을 포함하여 만수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공통점은 한 직업에서 일가를 이룬 투철한 직업의식의 소유자이며 한 길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사람들이란 점이다. 이는 첫 번째 희생자인 구범모(이성민 분)와 그의 아내 이아라(염혜란 분)가 나누는 산속 피크닉 장면에서도 아주 잘 드러난다. 실직 후 자신에게 소홀해진 남편에 대한 불만이 가득한 아내 아라는 낙엽 위에 자리를 펴고 앉아 그들의 첫 키스를 회상한다. 아내의 목소리를 빌려 소환된 과거의 남편은 "당신의 입술은 최상급 오카모토 습자지보다 부드럽습니다"라고 속삭이지만, 현실 산속의 남편은 그 낭만을 단숨에 파괴한다. 정신없이 닭다리를 뜯어먹는 와중에도 그는 아내의 기억을 교정해 준다 "오카모토는 콘돔이고, 습자지는 아키모토지." 추억의 갈피마저 제지맨으로서의 완고한 직업의식으로 재단해 버리는 이 모습과 다른 일이라도 할 수 없냐는 아내의 제안에 자신은 할 수 있는 일이 제지 회사에서의 일 밖에 없다며 ‘어쩔 수 없다’라고 외치는 장면은, 이들이 저물어 가는 아니 변해 가는 시대의 아픈 우리 어른들의 모습으로 뚜렷하게 읽히는 대목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두 번째 희생자인 고시조(차승원 분) 역시, 살인 대상을 살피러 온 만수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이력을 말하며 종이의 질과 용도에 대해 말할 때 가장 자신 있는 모습을 보이는 장면을 통해, 자신의 자부심을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강력하게 호소하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남편의 무릎 위로 자신의 발을 한껏 뻗으며 야릇한 분위기를 연출하려는 찰나, 자신의 취업통보서가 전화나 이메일, 문자로 오지 않고 ‘종이의 힘’을 살려 우편으로 배달되어 올 것이란 생각에 부리나케 아내를 밀치고 집으로 내려가버린 범모의 뒤를 향해 내뱉는 아라의 한 마디는 범모를 위시한 이들이 처한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야. 이 이면지 같은 새끼야”
박찬욱 특유의 감각적 표현과 공간의 상징성, 예술적인 미장센은 이 영화에서도 여실히 확인된다. 자신은 부인할지 몰라도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그만큼 ‘우아하게 포장된 날 것의 감각’을 기막히게 표현해 내는 한국 감독이 있을까 할 정도이다.
구범모(이성민 분)와 이아라(염혜란 분)의 산속 피크닉 장면에서, 남편에게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제지 공장의 기계에게 하듯이 자신에게도 "윤활유를 뿌려달라"며 욕망의 굶주림을 호소하던 아내는 남편이 산을 내려간 후 뜻밖의 조우를 한다. 자신이 살해할 대상을 염탐하다 뱀에 물려 오솔길로 굴러 떨어진 만수를 만난 것이다. 뱀에 물린 자리가 선명한 만수의 종아리에 입을 대고 정성을 다해 입술과 혀를 움직여 뱀독을 빨아내는 그녀의 행위는 구호의 외피를 쓴 탐닉이며 욕망의 해소로 읽히기에 부족함이 없다. 실직과 무기력으로 파괴되어 가는 가정의 모습 속에는 정신적, 윤리적 문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이 장면은 여실히 보여준다.
묘한 에로틱과 비극의 역설 사이에 존재하는 이들은 주인공인 만수와 미리도 예외는 아니다. 살인을 저지르느라 댄스 학원의 파티에 늦은 만수 앞에, 포카혼타스 차림의 아내 미리는 치과 의사(유연석 분)와 몸을 맞댄 채 춤을 추고 있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의 옷장을 모두 뒤진 후 그녀의 불륜을 의심하며 속옷을 검사하려는 만수의 모습을 ‘냄새 맡는 개’로 표현한 대목은 그래서 더욱 야릇하고 기괴하기까지 하다. 감독은 여기에 더해 남편이 끊었던 술을 다시 먹은 것으로 의심하는 아내 미리가, 역시 개처럼 남편의 얼굴과 입 주변의 냄새를 맡아대는 것까지 몰아붙인다. 이러한 감각의 극단은 이 가정의 비극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또한 자신에게 야릇한 눈빛을 보내는 남편의 친구에게 브래지어를 풀어헤치고 몸에 딱 붙는 티를 입고 맨살의 실루엣을 보이며 아들의 선처를 호소하는 대목은, 가족이라는 성벽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협상 도구이자 처절한 생존 전략에 다름 아니다. 이 비릿한 에로티시즘은 유혹이 아니라 생존의 막다른 골목에서 튀어나오는 비명 섞인 몸짓이기에, 이를 보는 관객의 마음은 더욱 쓸쓸하기만 하다.
이렇듯 원초적인 몸짓으로 성벽을 사수하려는 처절함은 만수가 머무는 '온실'이라는 공간에 이르면 더욱 지독한 통제욕으로 바뀐다. 감독은 온실을 통해 인간의 비정한 소유욕과 통제욕을 시각화한다. 분재에 탐닉하던 만수가 두 번째 희생자인 고시조(차승원 분)의 사체를 분재의 형식으로 묶어버리는 장면은 타인의 삶을 자신의 생존에 적합한 형태로 가공하려는 폭력성을 상징한다. 생명을 가꾸는 공간이었던 온실이 죽음을 디자인하는 작전실로 변모하고, 그곳에서 작성된 ‘레드 페퍼 페이퍼’의 살인 리스트는 마당의 흙 밑으로 하나씩 매몰된다.
영화의 미학이 가장 소름 끼치게 폭발하는 지점은 바로 이 '파헤치는 행위'의 병치에 있다. 세 번째 희생자인 선출을 묻기 위해 어둠 속에서 땅을 파는 만수의 거친 손놀림과, 아들의 의심(온실에서 아빠가 전기톱으로 시체를 토막 냈다는 생각을 하는)을 확인하기 위해 마당의 화단을 파헤치는 아내 미리의 손길은 화면 위에서 잔인하게 교차한다. 미리는 그곳에서 두 번째 희생자인 고시조의 사체를 목격했을 것이나, 그녀가 선택한 것은 진실의 규명이 아닌 '언어의 세탁'이었다. 아들에게 그것을 '돼지'라고 거짓말하며 안심시키는 순간, 미리는 남편이 쌓아 올린 범죄의 성벽 안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셈이다.
그래서 선출을 살해하고 돌아온 남편을 안아주며, 눈물을 흘리며 미리가 내뱉는 "열심히 살지 말지"라는 대사는 이 서사에서 가장 아픈 지점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살인까지 저질러가며 가정을 지키려 했던 남편의 광기에 대한 뒤늦은 탄식이자,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어야 했다는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경고였기에 그러하다. 그러나 그 탄식은 곧 정교한 위로로 변하며, 부부는 이제 '가족'이라는 명분 아래 묶인 살인의 공범이 된다. 타인의 목숨을 '돼지'로 격하시키고 남편의 피 묻은 손을 씻겨주는 아내의 포옹은, 이 지옥 같은 경쟁 사회에서 가정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비겁하게 서로의 잘못을 덮어주고 외면하며 스스로 괴물이 되어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슴이 저리도록 아픈 행동이다.
영화 <어쩔 수가 없다>가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곤혹스러운 지점은 만수가 끝내 ‘재취업 성공자’로 남았다는 사실이다. 감독은 만수를 살인자로 단죄하는 대신, 어설프고 미흡하기 짝이 없는 수사 끝에 그를 다시 일상의 일터로 복귀시킨다. 윤리의 브레이크가 들지 않는 폭주 기관차가 정거장에 무사히 도착한 셈이랄까. 이것은 법의 실패가 아니라, 도덕적 파산을 방치한 사회의 실패에 대한 준엄한 고발이라 할 것이다.
이 영화의 극 중 인물 모두가 외치는 것처럼, 우리도 그간 "어쩔 수 없다"는 비겁한 주문으로 얼마나 많은 순간을 회피하며 살아왔는가. 상황의 불가피성을 방패 삼아 우리의 선택에 면죄부를 주었던 그 비겁한 시간들이 모여, 결국 타인의 자리를 뺏어야만 내가 살 수 있는 거대한 제로섬의 지옥을 완성했다.
이 영화의 진정한 미덕은 그 참혹한 결과 앞에서 우리에게 지독한 질문 하나를 던진다는 점이다. “과연, 정말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 만수가 마지막 경쟁자인 선출에게 내밀었던 제안, 즉 좁은 의자 하나를 더 놓을 수 있는 사회적 합의를 시스템은 단칼에 거절했다. 우리는 왜 경쟁을 타인의 파괴가 아닌 건설적인 공존으로 설계해내지 못했는가.
영화 내내 만수를 괴롭히던 썩은 어금니를 스스로 뽑아버리고 내뱉은 그 시원한 탄성은, 어쩌면 우리 사회가 공존을 포기하고 선택한 집단적 감각 마비의 상징일지도 모른다. 고통을 느끼는 감각(양심)을 스스로 거세한 자만이 이 비정한 게임의 승자가 될 수 있다는 역설은 그래서 더욱 가슴을 시리게만 한다.
피 흘려 쟁취한 자리가 결국 AI가 지배하는 자동화 공장의 차가운 기계음 속에서, 홀로 막대기를 휘두르며 종이를 내리치는 허망한 몸짓으로 귀결될 때, 영화는 서늘하게 폭로한다. 우리가 인간성을 제물로 바쳐 얻은 전리품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의 주문이 이 극단적인 비윤리를 상상 가능한 현실로 만들었다면, 이제는 가진 것이 조금 줄어들어도 함께할 수 있는 ‘공존의 상상력’을 복원해야 한다. 그 비겁한 면죄부를 거두고 좁은 의자 하나를 더 놓아 여럿이 함께 앉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갈 때, 우리는 비로소 누군가 쓰다 버린 '이면지'가 아니라, 자신만의 결을 지닌 온전한 한 장의 종이로서 인간다운 표정을 되찾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