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럽 옆에 동그란 글씨로 빨갛게 쓰인 ‘자유의지’가 사라졌다. 온통 흰 벽에도 의미는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없을 때보다 생생하다. 아무리 자유의지가 환상이래도 그렇지 지울 필요까지 있었나 싶었고. 인간에겐 의지가 있다. 자유인진 모르겠지만. 인간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존재에게 있다. 태아의 의지 풀의 의지 코스모스의 의지. 노래방의 첼로의 책의 옷의 의자의 의지. 내가 만든다고 생각하는 것 조차 너의 의지. 그래서 내가 만드는 것 같지 않다. 얼마나 나오고 싶었길래 나왔을까. 그 중에서 예술과 아닌 것은 어떻게 다른가. 그 이름은 뭔가? 눈물이 나나? 웃음이 터지다가 충격적으로 기분이 더러운가? 대가리가 터질 것 같아? 내겐 최소한의 기준이 있다. 알기 전후로 미묘하게나마 바뀌어야 한다. 범위가 한없이 넓어진다. 난 자주 바뀌는 사람이다. 특히 기분이. 너무 넓어서 구분할 필요조차 못 느낀다. 그렇다면 탁월함은 무엇인가? 근데 백현진이 그랬다. 저는 더 이상 예술에 대해서 예술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아요. 저의 일상 친구들의 일상 그런 것이죠 대충 이렇게 말했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그건 정말 중요한 것이다.
이걸로 돈을 못 벌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다고 느끼는게 맞는 건가. 지금 당장 전부 돈으로 환산해야 가치가 있는 걸까. 이걸로 돈을 못 벌면 가치가 없는게 아니다. 머리로는 아는데 그렇게 느껴지지 않고. 허울 좋은 말이다. 아무 짝에도 쓸모 없다고 느껴진다. 아니야. 아니야 맞아. 아니야. 예전에 a가 그랬다. 인스타에서 잘 팔리는 의류 회사를 운영했는데, 삼십대 초반에 돈 걱정 안할 정도로 잘 벌어서 임자만 만나면 당장 내일이라도 결혼하고 싶다고 했고 네가 좋은 사람(뭘보고?)인 것 같아서 말해주는 거야 하면서 내게 물었다.
네가 생각하는 가장 큰 액수가 몇이야?
지금?
응 지금.
지금은 100억?
100? 왤케 커.
그래도 100억.
그래 그럼 10억. (?)
너한테 10억의 빚이 생겼어 그래도 넌 계속 글 쓰고 음악 할거야?
얼이 빠졌다.
10억. 10억으로 뭘 할 수 있지? 이러면서 100억은 어디서 나왔지.
글쎄..하겠지. 하기 위해서 기술 그런 쪽을 더 배우지 않을까. 어쨌든 만들기 싫은걸 만들 수는 없으니까..
그게 안돼. 그렇게 생각하면 안돼. 빚이 있든 뭐가 있든 네가 하는 걸로 돈을 벌 생각을 해야 하는 거야. 그래야 그걸 할 수 있는 거야. 절대 방향을 틀지 마.
그 말에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걔 표정은 오묘했고 슬픈건가 취한건가. 취해서 슬퍼가지고 저런 말을 하나. 암튼 내 심장은 물리적으로 쿵쿵대서 눈물이 났다. 한 마디로 설명 못하는데 그냥 들어야 할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꼰대 같다 그지. 하면서 슬프게 웃었는데 목소리는 모르겠고 그 말은 문신같다. 그걸로 돈을 벌 생각을 해야지.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 문신같은 말 참 많다. 문신은 지울 수 있는데 말은 지울 수도 없고 미셸 공드리 보고 자극받은 엔지니어 없니. 로켓 말고 그런거나 만들어줘. 네가 해야 할 말과 앞으로 해야할 것들 네가 들었던 말 앞으로 듣게 될 말. 계속 맴돌아서 뇌를 데쓰오일에 씻겨버리고 싶어. (이랑이 앨런 긴즈버그 시 개사해서 부른 건데 너무 좋아서 계속 쓰고 있다. 뇌. 데쓰오일. 완벽해.)
솔직하다는 말은 듣고 싶지도 않고 솔직히 내가 하는 말이나 제대로 듣고 싶다. 듣기 좋은 거나 보기 좋은 거 말고 진심으로 알고 싶다. 왜 이렇게 되었지.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흩어지는 걸 되는 대로 모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평생 못할거라고 생각했는데 평생 못할 건 없었다. 특히나 지금 같은 시대에. 욕심이 생긴다.
기억은 진짜인지 아닌지 구분하기가 어려운데 기타를 잡으면 알아서 튕겨 나간다. 쓸데없는 말은 사방에 쏟아지고 아 나 이런 말하고 싶었구나. 전혀 몰랐네. 이래서 뭔갈 만드는구나 싶었다. 학교에서는 만들기 싫어서 자주 울었다. 불쾌. 그때는 세상에 당하는 것 같았어. 이제는 좀 이용해 먹을까 해. 자만하면 또 세상이 덮친다. 그렇다고 있지도 않은 일 두려워하면서 살 순 없잖아? 몇달 전 엄마랑 한 대화 . 자만보단 희망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우린 좀 오만하게 말할 필요가 있어요. 잠시 미국의 백인 남성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볼까요. 그렇게 멀리까지 안가도 됩니다.
그런데 계속 글을 쓰다 보니까 하기 싫을 때도 말을 하고 글을 쓰고 있다. 이를테면 가만히 있는데 문장이 들려오고 그럼 받아적지 않을 수 없다. 좋은 것 같아. 받아 적다 보면 글이 길어진다. 그건 좀 많이 뿌듯하고 괴로웠다. 괴롭다. 스스로를 그렇게 훈련시킨 주제에 그걸 감당 못해서 울고 있다. 글이 길어지면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다. 또 기분인가. 하트를 받는 기분은 좋다. 하트 모양 자체가 젤리같고 귀엽다. 귀여운 걸 받는 느낌. 받는 느낌이 든다. 인스타가 익숙하다 외로워서 죽어보면 어떨까 싶을 때부터 했으니까 애증이다. 어릴 때부터 되게 오래 만나서 온갖 추레한 모습을 들킨 남자친구 같다. 그런거 없지만 아무튼 이상하고 사랑스럽고 다 해 짜증나. 그런 사람 있으면 인스타 안했고 글조차 안썼을 텐데 쓸데없이 진심으로 예술을 사랑하게 되었다. 피곤한 인간이 되었다고 느낀다.
전직 에디터가 쓴 책을 읽었다. 분명 좋은 책이었음에도 그런 방식으로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도 단정한 사람이었다. 별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비슷하게 다른 문장이 꼭 세번씩 나열되고 좋아하는 예술가의 글을 자신의 얘기와 잘 엮은 책이어서 읽기 편했다. 읽기 편한 글 쓰고 싶지 않아. 쓰고 싶지 않아 .쓸 수 없어. 내 마음이 읽기 편하지 않은데 읽기 편한 글 쓰는게 말이 안된다. 그러고 싶지 않아 착한 글 친절 한 글 지겨워 착하고 친절한 나도 지겨워 별로 착하고 친절하고 싶지 않아 근데 친절한 건 확실하게 달콤하다. 좋은 사람에겐 한없이 퍼주고만 싶어. 받기만 하는 건 불편하지 그러니 좋은 사람들과 주고 받고 싶다. 그러고 있다. 근데도 가끔은 무얼 주어야 할지 모르겠어. 얼만큼 줘야할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본 적 없어 그런데 생각해야 한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산책과 연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유진목 시인의 산문집이다. 난 그의 시보다 그를 좋아한다. 그래서 그의 시집보다 산문집을 좋아한다. 글을 이렇게도 쓰겠구나. 그런 기쁨 주는 문장 다음 문장. 내가 그런 글을 쓰지 못할까 봐 무섭다. 그럴 바에는 글을 쓰지 않겠다고? 네가 랭보냐. 랭보는 본 적도 읽은 적도 없는데 랭보가 절필하고 세계를 떠돌며 살았다는 이야기는 전설처럼 남아있다. 랭보 서한집. 시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힌 열다섯 시절부터 스물 한 살 무렵까지 쓴 편지를 한 데 엮었습니다. 랭보가 절필을 선언하기까지 그 이전의 활동과 젊은 예술가의 고뇌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난 랭보도 아니고 랭보만큼 느낌표 가득한 시를 쓸 수도 없으니까 아무거나 계속 쓰고 읽을 수 밖에. 최근에는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것처럼 쓰고 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너랑 나 둘만의 시간을 가지세요. 이건 전직 에디터였던 분이 책에서 한 말이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