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의 뉘앙스
친구가 비밀을 말해줄테니 너도 비밀을 만들어 오라고 해서(..! 하지만 난 비밀이 없는걸? 너에게? ) 이 참에 비밀을 하나씩 써보았는데 1번까지는 괜찮았다. 2번부터는 도저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다행히 나에게도 비밀이 있었다.
얼마 간에 확실히 느낀게 있다면 일상을 글로 녹여내고 보여주는 일은 때때로 수치스럽다는 점이다. 그 수치심은 섹슈얼한 욕망을 가감없이 드러내거나 일상을 노출하는 데에서 오지 않는다. 그보다는 나의 일부분을 공개하고 싶다는 열망 자체에서 온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 그 욕망에 간단히 지배되어 버리니까.
아니 에르노는 말했다. “자기가 겪은 일을 글로 쓰는 사람을 노출증 환자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노출증이란 같은 시간대에 남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하는 병적인 욕망이니까.” 그렇다면 나는 이 시대에 걸맞는 노출증 환자인 것 같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십대의 에르노에게 인스타그램이 있었다면 그녀는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노출했을까. 에르노는 내가 겪은 진실 외에는 쓰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1988년 만난 연하의 외국인 유부남 연인과의 이야기를 소설로 발표했다. <단순한 열정>은 1991년에 출판되었다. 그녀는 202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일상 속엔 타인이 넘쳐난다. 그리고 난 사적이지만 공개적인 기록에 그들을 어떤 방식으로 어디까지 포함시켜야 할지 고민하다가 쉽게 포기하곤 한다. 사적인 기록을 사적으로 남긴다. 그건 내게 포기에 가깝다. 일상을 편집하여 기록하는 건 다분히 즐겁고 기록만으로 의미를 갖지만 공개/비공개의 문제는 별개로 존재한다. 쓰고 싶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쓸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써야만 하는 것과 쓰여선 안되는 것이 있다. 그 동안의 결심. 부드러운 날들은 간결하게 새겨둔다.
기억 없이는 별로 살고 싶지도 않다. 지난 날을 덩어리로 간직하기 위해 기억에 가깝게 기록한다. 나는 기록을 너무너무 좋아하니까 앞으로도 계속 할 생각이다. 기록은 다양한 방식으로 공개될 것이다. 이건 정말 이상한 기분이다. 나의 일상을 불특정 다수와 공유하겠다는 열정은 흔하지만 낯설다. 공개적인 사적 기록은 무언의 경계를 요구하며 비밀은 타인에 의해 간직된다. 그 사이에서 말하기를 거듭하여 연습한다. 그 자리의 뉘앙스. 무엇이든 박제하고 싶진 않다. 최근에 수집한 단어의 목록처럼.
“ 너의 이십 대 단어는 뭐야?” 아빠는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일단 떠오르는 단어를 말하고 엄마 아빠의 단어를 번갈아 들었다. 친구를 만났을 때 질문이 떠오르면 묻고 그렇지 않으면 묻지 않았다. 물음을 던지면 뜻밖의 단어를 듣는다. 김사월을 들을 때처럼 듣는다. 난 김사월을 듣지 않을 때도 그녀를 듣고 있다. 튀어나온 단어는 되도록이면 가볍게 생각한다. 중요한 건 충동성. 목록은 갱신된다. 질문을 던진 뒤 단어가 기억되는 방식이 좋았다. 나는 충동적으로 '낭만'이라고 답했다. 그 후로도 종종 '낭만'을 떠올렸지만 이젠 그것에 대해 그만 생각해도 될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게 이 정도면 충분히 낭만적이다. 하지만 사실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따로 있었다. 그 단어를 떠올리자마자 헉 하고 단숨에 삼켰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충동적으로 이게 맞는 것 같다. 글로 못 쓰겠다. 다양한 방식으로 쓰고 지웠다. 이건 스타벅스만큼 남자를 좋아한다는 말과 비슷하다.
p.s. 요즘 가벼운 나의 단어는 야생(wild). 틈틈이 장난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