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개나 오로라, 형광등이나 네온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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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치마의 ‘Ling Ling’이 수록된 앨범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휴일씨(밴드 검정치마의 보컬 겸 작사 작곡가. 검정치마 그 자체)의 감이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그 전의 앨범들은 전곡이 명곡이었다면 이번 앨범은 다소 아쉬웠다. 역시 휴일씨도 늙었구나. 그러다가 너의 집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Ling Ling’을 다시 듣게 되었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휴일씨의 세련됨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하염없이 눈물이 났던 것이다.
도망치지 마 나나링. 도망치지 말자. 도망치지 말자. 자신에게서 도망치지 말자 링링. 집에 돌아와 울면서 계속 소리내어 말했다. 소리내어 울면서 말했다. 그러지 않으면 또 도망칠 것 같아서. 너에게 연락할 것 같아서. 남아있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머리를 끝까지 말리는 습관. 네가 골라준 옷을 아껴 입는 행위. 네가 보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보는 일. 이세이 미야케. 너랑 있을 때 산 동물 인형들을 버리지 못하고 캐리어 안에 넣어두는 일. 우리가 같이 쓰던 싸구려 바디워시. 샴푸. 네가 사 준 연한 민트색 샤프. 그 샤프를 부러뜨리려다가 그냥 쓰게 되는 일. 우리가 같이 듣던 노래. 네가 들어서 결국 나까지 좋아하게 되어버린 외국 힙합 플레이리스트. 공유된 구글 맵. 하트가 붙은 카톡방. 진주 목걸이. 네가 나의 인스타 스토리를 언제 보는지 강박적으로 확인하는 행위. 침대에 모로 누워 네가 오길 기다렸던 시간. 뒤에서 느껴지던 온기. 어설픈 발음으로 나를 부르는 소리. 쓸데도 없는 유튜브 타로를 치며 잠드는 일. 불면증에 가까운 습관들이 이어졌다.
맞다. 나는 일년 반만의 연애를 끝낸 후 며칠 간 여운에 젖어 있었다. 동시에 나의 시간과 공간을 되찾음에 감격해 자유를 만끽했다. 너랑 있을 땐 신을 수 없었던 통굽을 매일 매일 신고 나갔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런던 거리를 헤매는 느낌이 최고였다. 아무도 지금 내가 어디있는지 몰라.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유의 맛. 그리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우면 네가 보고 싶어서 엉엉 울었다. 그러던 와중에 학교 동기를 만나 너에게 새로운 여자친구가 생겼고, 네가 걔랑 찍은 사진을 인스타 스토리에 업로드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언제부터? 나랑 헤어지고 일주일 후부터. 나는 알지 못했다. 숨김 당했으니까. 너는 내 스토리를 열심히 보면서 나를 숨김 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주일이나 지난 뒤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심장이 덜컹거렸다. 친구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네가 만나는 새로운 여자애는 중국어가 가능한 한국애였고, 네가 좋아하는 머리가 길고 눈이 왕방울만하고 키가 작은 여자아이였다. 나도 여자아이인데 그런 여자애는 아니다. 나는 곱슬머리에 눈은 너보다 작고 키는 너보다 큰. 여자아이. 그 여자의 사진을 보는 순간 나를 떠난 남자들 옆에 남은 여자들을 한꺼번에 마주치는 것 같았다. 나는 혼자인데 너희들은 언제나 둘이다. 세번 차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철저히 혼자 남겨진 기분. 어쩐지 익숙하다. 익숙해서 익숙하게 눈물이 났다.
이번 일을 계기로 나는 다시 한번 남의 속마음은 영원히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했다. 일주일 간 밥도 거의 못 먹고 잠도 거의 못자다가 결국 너에게 디엠을 보냈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그것만 알려줘. 나를 만나는 동안 그 여자애를 만난던 것이냐,’라는 내용이었고 너는 굉장히 차갑고 싸가지 없는 어투로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는 말과 함께 ‘아. 인스타에 있는 내 사진은 전부 내려.’라고 말했다. 나는 그것은 나의 기억이기 때문에 네가 이래라 저래라 할 것이 아니며 그건 내가 원할 때 내릴 거라고 말하며 덧붙였다. ‘오케이. Have fun(이건 번역이 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그게 우리의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
솔직히 네가 나를 만나는 동안 그 여자애를 알고 지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너를 만나는 동안 때때로 불특정다수의 남자애들을 생각했기 때문에. 무조건 더 나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내 눈 앞의 너는 귀엽고, 따뜻하고, 향기롭지만 나는 더 나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그게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난 그렇게 생각하다가 너에게 헤어지자고 했다. 우리는 서로 좋아했지만 헤어져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점점 우리의 시간이 망해 갔을테니까. 그 점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날 너에게 여덟장의 손편지를 주고(참고로 한번도 이런 적이 없다.) 너의 집에 남아있던 나의 모든 물건을 챙긴 뒤 우린 부둥켜 안고 울었다. 그날 나는 굽이 있는 부츠를 신고 처음으로 너보다 한뼘이 커진 채로 너를 안았다. 이제 구두 신을 수 있겠네. 사랑해. 바이 누나. 바이 바이 누나. 너는 마지막에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너의 경박한 업로드로 인해 나의 아름다운 수고는 수포로 돌아갔지만.
나는 그 무엇보다 우리의 시간을 지키고 싶었다. 그건 내가 버리지 못한 코끼리 인형이다. 대만에서 산 거북이 인형이다. 차마 부러뜨릴 수 없었던 민트색 샤프다. 나는 지금 생각한다. 이런 마음으로 어떻게 너를 떠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너는 어디서 어떻게 일주일 만에 너의 취향인 여자애를 만날 수 있었을까? 나는 집에 돌아와서 계속 읊조렸던 말을 생각했다. 도망치지 마 도망치지 마. 나나링 너에게서 도망치지 마. 그날 나는 네가 준 코끼리 인형을 안고 스무번도 넘게 읊조리며 울었다. 그때 왜 그런 말이 나왔던 걸까. 문득 샤워를 하다가 떠올렸다. 너는 그 여자애를 선택했어. 그러면 나는? 나는 무얼 선택했지?
그렇구나. 불현듯 알 수 있었다. 나는 열정적으로 나를 선택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거울에 비치는 아이가 따뜻했다. 향기로웠다.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느껴졌다. 나는 나를 홀대하는 너를 버리고 나를 선택한 것이다. 네가 그 여자아이의 부드러움과 따뜻함과 향기로움을 선택할 때 나는 나의 부드러움과 따뜻함과 향기로움을 선택한 것이다. 앞으로 무얼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사랑 후엔 무엇이 오는 걸까? 최근에 종영한 드라마 ‘사랑 후에 오는 것들’에서 여자 주인공 베니는 남자친구인 준고에게 묻는다. 변하지 않는 사랑을 믿어? 준고는 말한다.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을 거라고 믿어. 훗날 둘이 헤어진 뒤, 준고는 사랑 후에 오는 것은 사랑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하지만 준고와 달리 나는 사랑 후에 사랑을 이해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사랑은 점차 알 수 없는 성질로 변해갔다. 내가 사랑이라고 짐작했던 모든 것은 해가 지날수록 추락하며 낡아갔다.
사랑 후에 무엇이 올까.. 생각하면 할수록 사랑이라는 동사 뒤에 오는 ‘후에’라는 부사가 이해되지 않는다. 그건 시작과 끝이 있다는 뜻인데 사랑은 시작되고 끝날 수 있는 성질일까? 생각을 거듭할수록 사랑은 시작된 적도 끝난 적도 없는 것 같다. 마음에는 플라즈마 같은 구석이 있어. 번개나 오로라, 형광등이나 네온사인. 그렇다면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은 쉼없이 움직이며 강해지거나 약해지는 성질이 있어. 번개나 오로라, 형광등이나 네온사인. 사랑은 때때로 영원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강해지거나 약해질 뿐이야.
연애가 끝난 후에 하나 알게 된 것이 있다. 모든 것은 한순간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만난 것도 한순간. 사랑에 빠진 것도 한순간. 내가 너에게 헤어지자고 말한 것도 한순간. 사랑한다고 말한 것도 한순간.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일주일 후에 다른 여자에게 반한 것도 한순간. 그 여자가 너를 좋아하게 된 것도. 전부 한순간. 한순간에 모든 것은 영원히 변한다. 영원히 모든 것은 변한다. 역시 나는 사랑 후에 사랑을 이해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다만 무엇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
Ling, ling 슬픈 표정 짓지 마
내 경계 없는 맘엔
수상한 그런 설계가 없어
Ling, ling 이해하려 하지 마
연약한 걱정밖에 없는 난
원래 그래
Ling, ling 아무 말도 하지 마
니가 돌아오는 날엔
더 이상 우릴 버리지 않아
Ling, ling 이건 한 줌 모래야
흘리는 순간 떠내려가는
원래 그런 사이인 거야
Young, young, young (ling, ling)
(Ling, l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