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사의 체리 이모티콘=(체리)
‘My (체리) is on fire’이라는 텍스트를 받았을 때 나는 TK Maxx에서 세일 품목을 살펴보던 중이었다. 한 손에 머그컵을 들고 소리 내어 깔깔 웃으며 네가 정말 서양남자라고 생각했다. 여태까지 내가 만나보지 못한 궁극의 웨스턴 보이. 너무 황당하고 귀여운 나머지 나는 친구들에게 스크린 캡처본을 보내줬고 그날부터 애들은 나에게 체리랑 관련된 게시물을 보내기 시작했다. 체리랑 관련된 릴스 체리 모양 빵 체리 모양 베개 등.. 너는 그렇게 우리에게 체리보이가 되었다.
이 체리보이가 나에게 다소 남사스럽고 발칙한 텍스트를 보내기 전까지 우리는 조금 아는 사이였다. 얘랑은 사운드 워크숍에서 한번 만났고(너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지만) , 나의 졸업전시에서 한번 만났으며, 네가 (체리)를 보내기 전까지 두 번인가 세 번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했다. 첫 번째 데이트로는 자연사 박물관(National History Museum)의 무료 사운드 전시를 보러 갔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빈백에 파묻혀 템스강의 소리를 들었다. 나는 어쩐지 네 곁에 눕는 게 남사스러워서 꼿꼿이 앉아있었다.
두 번째 데이트로는 베를린에서 막 온 너랑 루카 구아디노 감독의 신작 ‘퀴어(Queer)’를 보러 갔다. 그날 나는 편하면서도 은근히 섹시할 수는 없을까 고민하며 딱 붙은 아이보리 상의 위에 꽃무늬 수프림 후드집업을 입고 갔고. 베를린에서 방금 돌아온 너랑 파이브 가이즈(Five Guys)를 먹을 때는 후드집업을 끝까지 올리고 있다가 영화관에 가서는 끝까지 내렸다. 내가 팝콘을 내려놓을 때 너는 잠깐 내 몸을 보다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나는 내 작전이 먹혔다는 걸 알았다. 그날 밤 근처 공원을 걷다가 호숫가에 앉아 잠깐 네가 베를린에서 사 온 칼림바를 가지고 놀았다. 집으로 향하는 새벽의 나이트 버스는 질주했다. 평소보다 30분은 빨리 도착한 것 같았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두 번밖에 안 봤는데. 그날부터 네가 너무 만지고 싶어서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친구들에게 네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세 번째는 운 좋게도 클럽에서 만났다. 크리스마스 즈음이었다. 내가 ‘요즘 테크노 클럽이 가고 싶어.’라고 하자 걔가 클럽 FOLD(폴드)에 자기가 좋아하는 디제이가 온다는 디엠을 보냈다. 나랑 같이 가자. 응? 걔는 그날 고향에 내려가는 대신 나랑 클럽에 갔다. 밤에 보는 너는 유독 예뻤다. 나는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은근히 야한 옷을 대놓고 입을 찬스를. 그날 아침부터 센트럴에 나가 온갖 편집샵을 돌아다니며 뻔뻔한 옷을 찾아 헤맸고, 찾았다. 비치는 검은 스타킹과 롱부츠에 어울릴 만한 짧은 치마와 귀엽고 힙한 텍스트가 적힌(“get the fuck outta here”) 클럽용 티셔츠를.
그날 너는 유독 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클럽 라운지에서 너의 챠콜색 후드를 빌려 입고 담배를 나눠 폈다. 처음으로 우리 관계에 대해 얘기한 것 같다. 새벽 네시쯤, 집에 갈 시간이 되었고 나는 너에게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고 했다.
“우버로는 £17밖에 안 하고 20분도 안 걸려. 너네 집 멀잖아.”
우리는 가는 길에 싸구려 치킨 버거와 감자튀김을 샀다. 그날 너는 소파에서 자겠다고 했다. 나는 아쉬운 마음에 티를 만드는 척 거실을 서성거렸고 너는 되게 뜬금없이 다가와 물었다.
“너는 우리 사이가 그냥 친구라고 생각해 데이팅(dating)이라고 생각해?”
네가 먼저 이 얘기를 꺼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확실하게 말했다.
“그 사이라고 생각해 지금은. 하지만 나는 친구를 이런 식으로 대하진 않아.”
그날 새벽에 우리는 캐모마일 티를 쥐고 소파에 앉아 한참 이런 얘기를 했다. 전여자친구라던가 전남자친구 같은. 여태까지 어떤 관계를 맺어왔고 뭐가 그렇게 무서운지. 그러다가 해가 뜰 때쯤 잠에 들었다. 너는 아침에 기차를 타고 고향에 가야 했고. 몇 시간 뒤에 네가 방문 앞에서 말했다.
“잘 있어 링링”
그리고는 나를 한번 꽉 안았고, 나는 처음으로 네게 제대로 안겼던 것 같다.
크리스마스 이후에 우리 집에서 자메이칸 전통 음식 같은 걸 해 먹었다. 테니스 영화 같은 사랑 영화를 보다가 그날 너는 우리 집에서 잤고 우리는 섹스를 할 뻔하다가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네가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아직은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렇게 말했고 나는 섹스를 하면 꼭 연인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이게 진심인지 아닌지도 모른 채 너랑 떨어져 있는 동안 너에 대한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이번에는 기필코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기필코 해야 할 건 없었는데. 무엇보다도 너랑 몸이 안 맞으면 꽤나 절망스러울 것 같았고. 아마 그다음 날 아침에 했을 것이다. 그리고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완벽하지도 않았지만 처음은 언제나 어설픈 법이니까. 그때부터 난 조금씩 전 남자 친구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걔랑 처음 했을 때도 엉망진창이었지. 좋을 때는 정말 좋았는데. 약간 보고 싶다. 눈이 되게 예뻤는데. 웃을 때도. 여자친구랑은 잘 지내나? 식의.
다음날 우리는 아침에 한참 키스를 하다가 디자인 뮤지엄에서 하는 팀버튼 전시를 보러 갔다 (이 글의 성격이 런던 투어리즘 책자 같다는 느낌이 든다. 다소 로맨틱하고 지저분한 런던 여행을 장려하는. 그런가?). 전시장에서 너는 계속 지분거렸고, 계속 나를 끌어당기며 안았고, 나는 네 손가락을 잡거나 뒤에서 안으며 이상하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나중에 너는 문자로, 전시장에서 너무 흥분 됐다고 말했다. 그때 너는 무슨 이모티콘을 썼지?
나는 너에게 ‘(좋은) 아침(체리)’이라고 보냈고 너는 ‘(키위)’를 보냈다.
“왜 키위야?ㅋㅋ”라고 묻자 너는 그냥 키위 에너지를 느꼈다고 말했다.
너는 왜 체리냐고 물었고 나는 그냥 네가 전에 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적극적으로 문자 끝에 과일을 붙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무료 사운드 전시를 본 날부터 매일매일 연락을 했다. 거의 두 달 동안 썸을 탄 셈이다. 나는 여태까지 한 달 이상 썸을 타 본 적이 없다. 하루에 두 번 정도로 오가던 디엠은 갈수록 늘어갔고, 결국에는 i메시지로 옮겨서 숱하게 문자를 주고받다가 만나서 영화를 보거나 밥을 해 먹고 일주일에 이틀 정도를 같이 보냈다. 내가 친구들과 4박 5일 동안 파리에 갔을 때, 네가 나를 보고 싶어 한다고 느꼈다. 친구들이 런던에 돌아와 3박 4일 정도 있었을 때는 네가 나를 더 보고 싶어 한다는 걸 느꼈다. 나도 그랬다. 파리에서든 런던에서든 네가 보고 싶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새로 이사할 집을 구했고, 너는 기꺼이 나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이사 전날에 우리는 니콜 키드먼과 아주 야하고 어려 보이는 백인 남자가 나오는 영화 ‘Babygirl’을 보고 잔뜩 달아오른 몸으로 우리 집에 왔다. 너는 우리가 꼭 섹스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영국인인 네가 강한 단어를 쓰거나 단언하는 일은 흔치 않았기 때문에 나는 '필요(need)'라는 단어가 더 크게 느껴졌다.
다음날 너는 이사를 도와줬고 난 옥길에게 “얘가 없었으면 분명 울었을 거야.”라고 카톡을 보냈다. 친구들은 체리보이를 마음에 들어 했다. 네가 여태까지 썸 탔던 남자 중엔 제일 나아. 그게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나는 친구들의 의견에 동감하며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은 애야. 지금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너무 순조로웠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너는 연인 관계가 되길 꺼렸지만 난 그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순진하고 안일했던 것이다. 아무리 머리를 써도 나는 멍청한 나일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집에서, 그 모든 짐에 둘러 쌓인 채, 우린 처음으로 엄청난 섹스를 했다. 아니, 솔직히 엄청나진 않았지만 풀리지 않던 문제를 푼 듯한 섹스였다. ‘대화도 잘 통하는데 몸까지 잘 맞아. 최고잖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우리는 티를 마시며 침대에 누워 관계 자체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씻고 아침을 먹으러 나갔다. 아침을 먹으며 역사에 대한 아빠의 집착과 아일랜드, 기네스(Guinness)의 역사에 대한 시답잖은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네가 갑자기 표정이 슬퍼지더니 말했다.
“너랑 진지한 관계를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아.”
그 얘기를 듣고 나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뭐지? 왜? 눈물이 핑 돌았다. 애꿎은 토마토만 뭉개며 너는 급하게 음식을 욱여넣었다.
“그렇게 먹지 마. 체해.”
나는 그렇게 말하며 눈물이 찔끔 났다. 어쩌면 얘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섹스 때문인가? 아까 내가 했던 말 때문인가? 갑자기? 왜? 하필 비가 왔고, 나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계속 눈물이 났지만 울고 싶지 않았다. 너는 만나면 만날수록 내가 좋다고 말하며 그런데도 나와 연인 사이가 될 수 있는 건지 자기가 지금 연인 관계를 원하는 건지 아직 모르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 얘기를 듣다가 말했다.
“당분간은 연락을 안 하는 게 좋겠지? 그 후에 친구로는 볼 수 있는 거잖아.”
이렇게 얘기하며 정말 구질구질하고 매력 떨어진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우선은 거리를 두는 게 우리 사이에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너에게.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집에 돌아와서 짐을 정리하다 말고 침대에 누워 엉엉 울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근쟁현에게 카톡을 보냈다.
“사귄 것도 아닌데 배신감이 들어.”
쟁현과 통화하며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걔는 편안한 집을 만들어 주고 한동안 세를 주다가 느닷없이 나를 쫓아낸 것이다. 그것도 잠옷만 입고 있을 때. 확실하게 나에게 상처를 준 것이다. 쟁현과 통화를 끝내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걔한테 내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알려야 했다.
비록 먼저 문자를 보내는 것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리고 얘와 나의 관계가 연인 사이로 발전하는 것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오직 나만을 위해서 얘한테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장문의 텍스트를 보내는 일은 언제나 무섭다. 오거나 오지 않을 답장을 기다리는 시간은 더 무섭다. 식은땀이 나는 일이다. 무섭지만 해야 한다. 오직 나만을 위해. 다시는 체리 이모지를 못쓰게 되더라도. 나는 무서우면 언제나 그렇듯이 이어폰을 꽂고 나가 동네를 걸었다. 오늘은 무조건 맛있는 술과 과자를 먹으며 섹스 앤 시티(Sex and the City)를 봐야지. 무조건 맛있는. 무조건 재밌는. 무조건. 그때 얘한테 문자가 왔다. 체리나 키위 따위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