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맛이 드라이해
그날은 처음으로 너네 집에 갔다. 네가 진하게 선을 긋고 내가 장문의 텍스트를 보낸 뒤로 우리는 몇 번의 필요 이상으로 진지한 문자를 주고받다가 이번 주 일요일 오후쯤 만나기로 했었는데 그전에 일이 터진 것이다. 그날도 너랑 문자를 주고받고 있었다. 몇 달간 그랬듯이. 우리는 일주일 동안 진지한 문자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서서히 다시 (체리)나 (키위) 따위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관계 재정립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아니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섹스를 하면 안 되는 걸까? 손을 잡으면 안 되는 걸까? 도대체 무엇을 하면 안 되는 걸까? 이런 관계는 처음이었다. 사귀는 것도 아닌데 사귀지 않는 것도 아닌. 여태까지는 오히려 섹스를 하고 나면 관계가 명확해졌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너는 나를 좋아하니까 친구로만 지내고 싶지는 않다고 했는데 지금 사귀고 싶은 것도 아니라고 했지. 그렇다면 내가 먼저 바운더리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주제에 집에 키를 두고 나온 것이다. 운명의 장난처럼.
“나 오늘 키를 두고 나왔는데 오늘 플메들도 집에 없어(천사)”
“그럼 우리 집에 올래? 아니면 내가 그쪽으로 가서 너랑 시간을 보낼까?”
솔직히 네가 그렇게 다정하게 나올지 몰랐다. 그날은 정말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은 날이었는데. 일요일에 완벽한 모습으로 너를 봐야 했는데. 속옷도 없는데. 그런데 너네 집에 가보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네가 보고 싶었다.
(체리)의 집은 런던 외곽에 있는 지역으로 웬만하면 평생 가볼 일이 없는 곳이었다. 역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는데 너는 잘못을 짓고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같은 얼굴로 자전거를 끌고 왔다. 안녕? 안녕. 그리고 우리는 큰 세인츠버리에 가서 칫솔과 팬티를 샀지. 초콜릿이랑 과자도.
큰 공원을 가로질러 한참을 걸어서 네 집으로 갔다. 너네 집은 생각보다 깨끗하고 컸다. 그리고 온통 마릴린 먼로로 도배되어 있었다.
“..집 주인이 먼로에 미쳐있네.”
(체리)는 내가 언급을 하기 전까지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는 먼로를 알아채지 못했다고 했다. 먼로는 현관 벽에도 걸려있었고 거실 벽에도 걸려 있었고 심지어 아이코닉한 포즈(하얀 치마를 부여잡는)의 작은 먼로 동상까지 있었다. 집주인은 고약한 취향을 가진 듯했다. 우리는 같이 밥을 먹고 내가 실수로 가져온 고급 스카치(가방에 그냥 들어있었다. 키는 없고. 이건 운명의 장난이 아닐까?)를 나눠 먹고 조금 취해서 수다를 떨다가 각자 샤워를 했다. 얘 침대 위에는 내가 디즈니 랜드에서 사다준 스티치 인형이 있었다. 네 방에서는 팔로 산토 냄새가 났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좋아하는 애 집에서의 첫날밤은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걔가 쓰는 샴푸를 쓰고 바디워시를 쓰고 티셔츠와 바지를 빌려 입는 건 섹스보다도 친밀한 행위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상대방을 볼 때면 기분 좋은 긴장감이 돈다. 멍청한 나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고도 얘를 좋아한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따라 얘가 두 배는 더 잘생겨 보였던 것이다. 나는 바운더리를 정해야 하는데.
네가 저번주에 진하게 선을 그었을 때— 간결하고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아무렇지 않게 함께 아침을 먹다가 나랑 진지한 관계로 넘어갈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을 때— 나는 너에게 몸과 마음을 다 주면 곤란하겠다고 생각했다. 너는 우리 집에 몇 번이나 와서 내가 가장 아끼는 잠옷을 빌려 입고 내가 쓰는 샴푸를 쓰고 바디워시를 쓰고 잠도 자고 키스도 하고 섹스도 하고 나랑 밖에서 손까지 잡고 다니는 마당에 나랑 진지한 관계를 시작할 수 없다고 말한 건데. 그제야 나는 나의 바운더리는 무엇이었고,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선, 나는 남자친구가 아닌 남자 사람에게 하트 이모티콘을 쓰지 않는다. 빨강이든 파랑이든 오해를 살 수 있는 하트 모양 자체를 기피하는 편이다. 어쩐지 헤프게 하트를 쓰면 내 마음까지 하찮게 느껴지는 것 같다. 둘째, 나는 남자친구가 아닌 남자 사람을 내 침대에서 재우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보기 좋게 이 규칙이 무너졌다. 이 규칙을 다시 세워야 할까? 셋째, 남자친구가 아닌 남자 그리고 남자친구가 되지 않을 남자와 매일 같이 문자를 주고받지 않는다. 넷째, 필요 이상으로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마음이 없는 남자에게 하는 짓과 비슷하다. 그게 나를 슬프게 만든다. 내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좋아하는 남자를 안 좋아하는 남자처럼 대해야 한다는 게.
일요일 오후에 너를 만나서 해가 질 때까지 햄스테드 공원을 걸었다. 너는 계속 미래를 약속하는 듯한 말을 했다. 다음에는 조금 더 일찍 만나자거나 다음에는 런던 동물원에 가보자거나. 그리고 나는 그런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너의 다음을 믿지 못한다. 저녁으로는 네가 런던에서 가장 좋아한다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피자를 먹었고, 한참 수다를 떨었는데도 너는 아쉬운 티를 내며 술을 마시자고 했다. 우리는 아트 시네마에 들어가서 영화는 안 보고 각자 사이다(cider)를 시켰다. 너는 내 사이다가 하드코어라고 말했다.
“어쩌면 내가 그럴 수도 있지.”
난 그렇게 말하며 쓰기도 하고 달기도 한 맥주를 계속 들이켰다. 내 마음 같다. 내 마음을 들이켤 수 있으면 이런 맛일 거야, 하면서.
“..사실 그날 아침 너한테 그러기 전에 나는 너에게 깊은 감정을 느꼈어.”
(체리)는 그렇게 말하며 아침에 느낀 강한 감정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에게 극단적으로 선을 그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바운더리를 찾고 있다는 내 말을 듣고 솔직히 서운했다고 말했다. 한참 그런 필요 이상으로 진지한 얘기를 하고 있는 와중에 어려 보이는 직원이 물었다.
“너네 팝콘 먹을래?”
마릴린 먼로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진이 그려진 팝콘 박스에 직원은 공짜 팝콘을 가득 담아줬다. 또 마릴린 먼로네. 우리랑 마주 보고 앉아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를 깨물고 있어. 나도 그러고 싶어. 내 속마음 같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런데 너무 진지하다는 것만 알겠다. 필요 이상으로. 지금 너와 나의 사이는 딱 (체리). 이 정도일 뿐인데. �❤️���� 이 중 난 아무것도 못쓴다. 그렇게 생각하며 하드코어한 사이다를 들이켰다. 끝맛이 드라이해.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어,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