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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나링 Sep 28. 2024

둘리

오늘도 어김없이 난



디제이를 좋아하는 건 멋진 일이다. 일주일에 두번씩 약속 없이도 볼 수 있다. 끊임없이 얘기하지 않고도 대수롭지 않게 함께 있을 수 있다. 색다른 내 모습을 부담스럽지 않게 보여줄 수도 있다. 덕분에 난 한달 째 주말마다 쌩쇼를 떨며 패션쇼를 하고 있다.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담배를 너무 많이 피게 된다는 점인데 담배를 필 때마다 걔랑 얘기할 수 있으니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디제이를 좋아하는 건 정말이지 멋진 일이다.


믹싱을 하다가 눈이 마주치자 약간 반가운 기색으로 목례를 한다. 내가 왔는지 몰랐나보다.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 사람이 살짝 놀래는 얼굴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걔는 오늘도 헐렁한 흰티를 입고 귀여운 음악을 튼다. 일이 끝나면 슬렁슬렁 내 쪽으로 와서 말을 건다. 아무렇지 않게 가까이서 말을 주고 받으며 근처에 머문다. 요즘엔 일주일에 두번씩 구석진 클럽 문을 열고 이름조차 몰랐던 바를 찾는다. 그러면 눈에 보이는 걸 그대로 녹화하고 싶어진다. 카메라를 아무리 들이대도 담기지 않을 만큼 좋다. 보기에 좋다. 듣기에 좋다. 그렇게 기분이 좋아진다. 


걔가 트는 음악은 뭉크의 초상화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이 있지만 왠지 아기자기한 점이 신기할 정도다. 말을 나눠보니 딱 그만큼 아기자기한 사람이었다. 사실 아직은 잘 몰라. 우린 고작 몇번 말을 나눠본 게 전부고, 낮에 한번 만났고, 난 좋아하는 사람을 너무 좋게만 보니까. 내게 친절하지만 나란히 걸을 때면 뒷짐을 진다. 가까이 다가가면 살짝 멀어지기도 한다. 자신에 대해서 많은 걸 얘기해주지만 질문이 많지는 않다. 걔가 그러는 동안에 난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장소를 끄적거렸다.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그 곳에 가고 싶었다.


나는 여태껏 가질 수 없는 걸 욕망한 적이 없다.

그게 무엇이든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야 비로소 탐이 났다. 분에 넘치는 프라다 백이 갖고 싶을 땐 에코백을 샀고, 백 만원을 호가하는 코트가 눈에 밟히면 십 만원 짜리 코트를 샀다. 그리고 언제나 B안에 완벽하게 만족했다. 애초에 살 수 없다고 생각하면 별로 갖고 싶지도 않았다. 삶도 다를 바 없었다. 대체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들만 해내며 살았다. 마찬가지로 내가 친해지고 싶은 사람보다는 먼저 다가오는 이들과 무난하게 잘 지냈다.


음식을 두고 싸울 형제도 없고, 미치도록 갖고 싶은 것도 없으며, 먹고 싶은 건 그때 그때 먹고, 원하는 건 대체로 산다. 큰 걸 바라지도 않는다. 가질 수 있는 것만 탐내며 적당히 사는 건 익숙하다. 원하는 걸 기필코 얻어낸다는 개념이 희미 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포기할 수 없는게 생겼다. 가질 수 없을 것 같은데도 가져 버리고 싶어서 여태껏 바래왔던 것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곳에 있고 싶었다. 미치도록 가고 싶어서 몸 둘 바를 몰랐다. 편의상 그 곳을 「둘리」라 칭하겠다.


「둘리」는 내가 꿈꾸는 모든 곳이다. 그 쪽으로 가기 위해선 본성에 어긋나는 인내력이 요구된다. 인내심이 아닌 인내력. 팔딱거리는 충동성을 잠재우며 갖은 애를 써야 한다. 지금 당장 갈 수도 없고, 돈과 시간을 들여도 갈까 말까 했다. 혼자서 고군분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정원이 딸린 집에서 친구들과 가든 파티를 한다. 좋아하는 사람과 말없이 음악을 들으며 나란히 누워있거나 자연스럽게 사람들 앞에서 기타를 잡고 노래를 부른다. 당연히 요즘엔 걔랑 주로 둘링한다.


거기서 우린 나란히 가을 옷을 입고 합정을 걷는다. 아무렇지 않게 후줄근한 티를 빌려 입고 대자로 누워 LP판을 듣는다. 야하고 부끄러운 짓을 빠짐없이 하다가 아침엔 커피를 마시며 같이 게임을 한다. 지금과 달리 넌 나를 먼저 만지고, 난 눈치없이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한다. 여기서 우린 대수롭지 않게 서로를 만질 것이었다. 아 위험하다. 고작 서너번 만난 게 전부인데.


평일에는 그가 일하는 레코드 샵에 찾아갔다. 평소엔 먼저 연락하며 뭘 하는지 묻는다. 걔는 아직도 드문드문하다. 언제까지 이럴지 모르겠다. 그래도 점점 촘촘해진다. 내게 질문을 던지고 친한 친구에게도 말 하지 않은 걸 말해준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소개시켜 주고 나를 보며 웃는다. 하지만 알고 있다. 나는 그곳에 영영 초대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최악의 경우, 날 싫어하게 될 수도 있다. 난 그게 미치도록 무섭다. 그럼 몇 날 며칠을 울며 썩은 생선처럼 지낼 것이 뻔하다. 그래서 참는다. 참고 또 참는다. 타로 선생님은 내게 하고 싶은 것 의 1/3만큼만 하라고 했다. 얘를 제대로 오래오래 보고 싶다. 그럼에도 난 성실하게 「둘리」를 그린다. 그릴 수 밖에 없다. 그리지 않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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