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시 공부 1년 차, 탈모가 왔다

공시생 잔혹사 - 9

by pajaroazul

처음엔 샤워해서 그런 줄 알았다. 긴 머리에 자주 빗지도 않는 푸석한 머릿결이라, 엉켜있던 머리카락이 린스 빗질 덕에 걸러지는 것이라고. 한 줌 가득 나오는 털로 물레를 감든 둥근 공을 만들든 간에, "이러다 대머리가 될지도 몰라."라고 엄마에게 농을 던지고 말 일이었다.


그런데 한 달 전께부터 그 한 줌이 하루에 세 번씩 나오기 시작했다. 뭐지? 아침에 그만큼이나 뽑았는데, 방바닥에 떨어진 털이 줄지를 않았다. 흠, 요즘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설마. 만 26살, 한창일 나이에 탈모는 웃기잖.


그렇지만 방바닥에 파래 양식장처럼 얼기설기 설켜 있는 머리털 더미들을 보니 심란했다. 더 이상 회피한다고 될 일이 아닌 듯싶어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넓은 이마, 이건 원래 이랬고. 헤어라인... 어?

신이시여


좌우 헤어라인이 눈에 띄게 뒤로 물러나 있었다. 이 부분이 이렇게 맨둥맨둥한 데가 아닌데. 뽀얀 살이 보일 데가 아닌데. 깨끗했다. 다급하게 손을 들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손가락 사이로 들어오는 머리숱이 가볍기 그지없었다.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신적으로 몰려있는 상황에서 발휘되는 주특기가 하나 있다. 나는 그것을 '스위치 끄기'라 불렀다. 일종의 현실 부정이자 스마트폰의 방해금지 같은 기능이다. 새로운 알림이 떠도 아무 일 없는 마냥 가려주는 기능.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머리가 빈약하다는 걸 확인한 순간, 내 뇌 누구보다 르게 움직였다.


'자, 두 가지 선택이 있어. 하나는 화장실에 주저앉아 울거나 소리를 지르는 거야. 다른 하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가서 하던 일이나 마저 하는 거고. 어느 쪽이든 빈 머리가 하루 만에 다시 자라진 않겠지.'


숨을 고르고, 질끈 감았던 눈을 다. 처지를 인정해버리면, 비관까지 하게 되면 정말 끔찍할 것이다. 후자를 택하자. 다행히 원형탈모인 것 같진 않았고, 남들이 단박에 알아챌 수준도 아니었다. 병에 갈 여유 따위 없었고, 주사는 더 싫었다. 국 대처랍시고 한 일은 사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엉키는 긴 머리를 단발로 잘라버리는 거. 듬성한 건 여전했지만 뽑히는(아니, 내 눈에 밟히는) 머리카락은 훨씬 준 것 같았다. 애지중지 기른 긴 머리는, 엉뚱한 죄를 뒤집어쓴 채 가차 없이 잘려나갔다.


친구는 CPA 고시반에도 탈모로 주사 맞고 바로 회복한 동기들이 많았다 나를 위로했다. 하지만 스트레스성 탈모를 앓는 내 부모님의 경우, 몇 년째 큰 차도가 없었다. 탈모에 관해서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비싸고 아픈 주사를 자주 맞아야 한다는 것. 한번 빠진 머리는, 특히 심리적 요인인 경우, 원흉이 제거되지 않는 이상 쉬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친구의 친구들은 젊어서 그랬던 건지, 공부만 하면 생긴다는 일종의 '고시병'증상이었던 건지 알 도리가 없다.(병원 외출을 할 때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나갔다 하니...)


어찌 되었든 공부 1년 차가 되어가는 마당에 탈모라니, 공시생이 맞긴 한가보다.


근데 이거, 그래서 좋아해야 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