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에서 공무원을 비롯한 시험 관련 글을 읽다 보면가끔씩 접하는 레퍼토리가 있다. 과거에 나는 실패자였으나 노력을 통해 패배자에서 벗어났고, 현재는 부모님도 자랑스러워하는 자식이 되었노라. 아하, '인고 끝에 부모님께 인정받은 미운 오리 새끼' 서사. 낯설지 않군. 이런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에게 '실패자'란 딱지를 가장 먼저 붙이는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부모다. 수년간의 관찰과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한국 부모들은 자식의 인생에 대해 '실패'나 '패배'라는 단어를 자주, 쉽게 내뱉는 것 같다. 물론 외국인 밑에서도, 여러 손을 거치며 자라지도 않은 필자의 의견일 뿐이니 어폐가 있을 것이다. 감안하고 봐주시길.
어떤 관계이든 간에 20년 가까이 붙어살다 보면 볼꼴 못볼꼴 다 보는 건 당연하다. 부모도 자식에게 상처 받고 실망한다. 이를 어느 정도 표현한다고 해서 나쁘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자격 없는 부모만큼이나 막돼먹은 자식들도 많은 세상이다. 독한 말이라 한들 까보면 악의보다는 사랑이 깃들어있으니, 어떤 의미로는 환장할 노릇이다.
우리 부모님도 마찬가지셨다. 특히 아버지. 63년생, 끝물 부머 세대인 당신께서는 그 시대 분들이 으레 그렇듯 '실망했다.'는 한마디가 아이에게 정확히 어떤 영향을 주는지 모르셨다. 어릴 때야 거짓말을 한다든가, 동생과 다툰다든가 하는 도덕적, 인격적인 잘못에 실망을 운운하셨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는 달랐다. 첫 대학을 때려치우고 재수까지 했는데 SKY를 가지 못했을 때, 당신이 정해준 시기에 유학을 가지 않고 연애를 했을 때, 졸업 후 백수가 되어 진로 문제로 신경전을 벌일 때, 아버지는 '실망했다'라고, '실패한 선택'이라고 말씀하셨다. 딴에 고심해 내린 결정임에도 성급히 맞다 틀리다를 판단하셨고, 세간보다 더 냉정한 잣대로 득실을 평가하셨다. 과정에서 얻는 배움이나 소기의 성과(재수의 경우 여대 탈출과 수능 미련 털기)는 무시되었다. 하긴, 요즘도 잊을만하면 교직이수를 하지 않은 걸 두고 희대의 실수라 지적하시니 말 다했다.그저 담담하게, 던지시는 비수가 아프지 않은 척 지내는 게 최고라 여기며 살아왔다.
그러다 지난가을에 사건이 터졌다. 남동생이 문제를 일으켜 나머지 가족들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고 있던 상황이었다. 갓 졸업한 데다 장래 문제로 예민했던 나는 총대 맨다는 각오로 강하게 불만을 표했다. 그런데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망나니 남동생에 정당한 불만을 표했을 뿐인데, '왜 그러냐'는 비아냥이 돌아왔다. 본인들의 건강까지 해칠 정도로 괴롭혀대는 아들보다 옆에서 걱정하고 도와주려 하는 딸들에게 더 큰소리치시는 부모님께 화가 났다. 공감은커녕 논리조차 먹히지 않는 대화. 평생 해왔으니 익숙해질 법도 한데 그날은 부아가 치밀었다. 화를 참지 못하는 모습에 아버지는 "넌 예전과 똑같다. 네 성격은 전이나 오늘이나 나아진 게 하나도 없다. 실패했다. 대실망이다."라고 역정을 내셨다. 그 말에 마지막 이성이 날아간 나는 싸늘한 톤으로 말했다.
"감히 나에 대해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잠깐. 아침드라마 뺨치는 전개와 글쓴이의 격렬한 반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연 설명이 필요하겠다. 부모님 두 분 다 형제가 많으셨다. 막내아들인 아버지와 중간 딸인 어머니는 장손이란 족속들에게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갖고 계시지 않았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가족사이므로 함구하겠다.) 요지는 당신 나름대로 장손에 관한 나름의 생각과 이상을 품고 계셨다는 점이다. '집에서 큰 사람이 배려하고, 유하게 굴어야 집안 분위기가 망가지지 않는다.' 따위의 이야기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세 자식 놈 성격 모두 유별나건만 유독 내게만 관련 피드백을 하신 것도 같은 맥락이었을 것이다.내게 '첫째'로서의 정체성은 막중한 책임인 동시에 최소한의 덕목이었다. 당연히 뭐든 동생보다 잘해야 했다. 마땅히 성숙해야 했고, 욕심을 부려서도 안되었다. 존재 자체로 이미 많은 것을 동생들로부터 뺏어갔으니까.
이런 탓에 유치원 입학 전부터 나는 '성질 더러운 아이'이었다. 원체 소심한 성격에 자격지심이 더해지면 뭐가 나오는지 아는가? 자기혐오다. 유치원 울타리 앞에서 어깨를 움츠린 채 '평생 만나본 사람이 많진 않지만 엄마, 아빠가 난 예민하고 짜증 가득한 아이라고 했으니까 친구도 못 사귈게 뻔해.'라 되뇌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자라면서는 어른들 말에 힘을 싣기 싫어 화를 조금씩 숨기기 시작했다.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 목동으로 이사를 왔고, 상황이 악화되는 게 느껴졌지만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맞벌이로 고생하며 흰머리만 늘어가는 부모님께 보여드려야 할 건 대학 합격증이지 진단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받은 내리사랑의 진정성을 한번도 의심한 적은 없다. 여러 방면의 지원과 투자를 아끼지 않으셨고, 표현하진 않으셨어도 언제나 자식 걱정뿐이신 분들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방식에 분명 문제가 있었다. 내 상태는 갈수록 불안정해져 갔고, 결국 대학 첫 학기가 채 지나기도 전에 상담소 문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