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모가 달라질까요(中)
공시생 잔혹사 - 12
by pajaroazul Nov 29. 2021
어릴 적, 어머니는 연년생 둘을 키우며 시부모까지 모시는 워킹맘이었다. 맞벌이 가정이었던 탓에 여동생은 외가 쪽에, 난 친조부모님 손에 맡겨졌다.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두 분 다 한 성격 하시는 데다 형제끼리 사이가 좋지 않아, 부양 책임이 막내아들인 아버지에게로 내려왔다. 누구보다 어머니가 고생하셨다. 그때 받았던 스트레스로 병을 얻어 오늘날까지 고생 중이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조부모를 빼다 박은 날 미워하는 것도 수긍이 갔다. 목욕탕에 가는 토요일, 여동생 손만 잡아주고 내 손은 매섭게 내치던 엄마에게 느꼈던 당혹감이 20년이 흐른 지금도 생생하다. 그 주에 직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새 또 할머니의 핀잔을 들은 것일까. 네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던 나는 내쳐진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부랴부랴 "엄마!"를 외치며 높은 철문 턱을 낑낑 넘어 동생과 엄마의 꽁무니를 쫓았다. 딸부자 고명 아들 집안의 중간 자식, 돈 없으니 대학도 가지 말라던 부모 밑에서 자수성가한 어머니는 자주, 애정과 자원을 독차지하는 첫째를 못마땅해하셨다.
그게 내 전(全) 인생의 스포일러가 될 줄이야.
아버지는 어머니를 끔찍이 사랑하셨다. 본인부터가 당신 가족의 결핍에 넌더리를 내시던 분이었고, 가난하지만 우애 깊은 형제를 둔 배우자를 부러워하셨다. 아빠는 내 기질을 이해했지만 결코 편들어주시지 않았다. 당신 집안사람다운 모습을 보이면, 마치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을 본 것 마냥 질색하셨다. 분가 후 날 돌봐주셨던 조부모님은, 어느샌가 악당이 되어계셨다. 난 그게 자연스러운 거라 여겼다. 두 분 성격은 고약하고, 그걸 물려받은 나 또한 개차반이다, 고로 생겨먹은 대로 굴면 조부모님이 그러했듯 엄마 아빠를 괴롭히는 꼴이 될 것이다. 솔직히 헷갈렸다.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나한테 잘못한 건 딱히 없는데. 그렇지만 날 낳아준, 앞으로 훨씬 더 긴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할 부모님이 그분들을 미워하니까. (언니, 누나에게만 성대한 돌잔치를 열어줬다며 투덜대는 동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복 터진 첫째. 버르장머리 없는 첫째.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첫째. 부모님과의 관계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았다. 잘해봐야 본전 치기나 될까? 책임감 있고 성실하게 굴어봐야 당연한 거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손가락질받는 사람. 좌절감의 반복. 사춘기 즈음, 어차피 글러먹은 거 생겨먹은 대로 행동해야겠다는 충동이 일었다. 예민하기 그지없다. 일이 뜻대로 안 되면 불같이 화를 낸다. 그마저도 안되면 분에 못 이겨 펄쩍 뛴다. 뭘 하든 반응은 한결같았다. '역시 할머니 닮았다니까.'
스트레스가 심했던 목동에서의 10대 시절 또한 하등 도움 될 게 없었다. 장손. 가장 목돈을 많이 부은 투자상품. 마땅히 책임감에 불타올라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는) 큰 자식. 난 딸이 아니라 장손이었다. 여우짓하는 중간 자식이어서도 안되고, 어딘가 어리바리한 막내 여서도 안된다. 사춘기, 동생이 한참 외모에 관심을 기울일 때도 선머슴처럼 바지를 입고 립밤도 바르지 않은 채 돌아다녔다. 어학연수까지 다녀온 주제에 동생보다 성적이 낮으면 안 된다. 바보 같은 실수를 하고 울면서 엄마를 찾으면 안 된다. 그런 강박-일부는 기대였을-에 묶여 살았다. 수능 날 동생들은 망쳐서, 잘 봐서, 부모님의 품의 안겼지만 난 아니었다. 망친 주제에 채점도 안 하냐며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옆집 누구는 쉬웠다던데?'라는 무감각한 동생들의 말에 무슨 반응을 하겠는가? 울까? 울면 뭘 잘했냐고 또 비난할 텐데? 제일 많이 받아놓고선 쥐뿔도 없었다는 비아냥은 어떻게 견디고? 고3 겨울 방학 기억은 알바가 전부다. 수능 이후 논술 합격 발표날까지 집에서 한 끼도 먹지 않았다.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혼자 편의점에서 때웠다. 어차피 식탁에 간다 한들 내 자리엔 수저도, 밥그릇도,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사방에서 원망이었다. 여동생은 왜 다른 집안 언니들처럼 꾸민다거나 사근사근하질 않느냐며, 왜 자신이 바라는 언니가 되어주지 못하냐며 따졌다. 남동생은 그렇게 똑똑한 척을 하더니 이대밖에 못 갔다고 비아냥거리는 내용을 일기에 썼고, 멍청하게도 그 일기가 담긴 전자사전을 내게 빌려줬다. (웃긴 건 내 성적이 항상 더 좋았는데 말이다.) 그런 기억들이 쌓이고 쌓였다. 대학 진학 후엔 이전만큼 부모와 싸우지도 않고, 기숙사에 간 동생들을 볼일도 적어졌다. 재수까지 해서 새 학교에 들어갔으니, 이제 즐겁게 1학년을 즐기면 된다.
그런데 우울했다. 잠에 들질 못했다. 밖에 나가지도 않았고 방 안에 틀어박혀 노트북 화면만 보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살고 싶지 않았다. 시간은 넘치고 육체는 푸르건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죽음뿐이었다. 학교 상담소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대학 상담은 재학생에겐 무료지만 학생별로 사용할 수 있는 최대 시간이 정해져 있다. 교수님의 배려와 별도의 노력, 외부 도움으로 꾸역꾸역 3년을 채웠다. 마음 쓰임, 섭식장애, 자해, 단체 상담, 개인 상담, 대학원 실험 참여, 정신과...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했다. 돈이 부족해 알바를 늘리면서라도 나를 고치고 싶었다. 다들 내가 그렇게 문제라고 하니까.
괜찮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첫 남자 친구가 정신병 운운하는 악담을 퍼붓곤 이별을 고할 때까진. 자살시도까지 한 누나를 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둔감한 언행을 이해하기 더 힘들었다. 헤어진 그즈음 고학년이 되었고, 진로 문제까지 겹쳤다. 컴퓨터 공학으로 틀었지만 실패했다. 노력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무력했다. 학기 내내 밤을 새우며 공부만 했는데 성적이 다 C, D였다. 되는 일이 없었다.
모교 사회과학대 건물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고건물이다. 학교가 문을 열었을 때부터 있었던지라 반짝거리는 요즘 대리석과 달리 벽돌 하나하나가 거칠고 더럽기 짝이 없다. 그리고 난 거기에 무식하게 주먹질을 했다. 두어 번 벽을 치면 팔 뼈 전체가 아려온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친다. 뼈가 부러지면 깁스를 하게 될 거고, 어쩔 수 없이 시선이 쏠릴 텐데, 곤란하군. 그러면 대신 벽돌에 손을 찧자. 보통은, 쓰라림이 느껴지면 멈췄다. 그날은 아니었다. 쓰라림을 넘어 시원함이 들 때까지 찢고 긁었다. 눈물이 고였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옥상에 올라가기엔, 몇 달 전 한 학생이 투신하는 사건이 있어 시기도 애매하다, 고 생각하는 스스로에게 웃음이 났다. 죽고 싶으면 뭐해, 뛰어내릴 용기도 없는 주제에. 우리 엄마가 그랬어, 난 별반 아프지도 않으면서 엄살이나 핀다고. 그러니까 네가 이 모양 이 꼴인 거야.
피부에 감각이 둔해졌다. 붉어졌던 곳에서 나온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공포심이 몰려왔다. 이쯤 되면 겁을 집어먹든, 화가 풀리든 해야 되는데. 오늘은 까지는 수준이 아니라 찢어질 때까지, 원망과 분노와 좌절이 풀릴 때까지 계속하고 싶었다. 본인도 섬찟하긴 했는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상담교수님이 계신 건물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눈물범벅에 손 한쪽이 너덜너덜해진 꼴을 보고 놀란 직원분이 교수님을 호출해주셨다. 그때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선생님이 소독하고 약을 발라주시는 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마음이 아파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거짓말이거나 배부른 소리인 줄 알았는데. 난 정말 미친 걸까? 아니면 정말 큰 결함이 있어서 이 지랄을 떨면서 밖에는 살 수 없는 사람일까? 이래서 다들 날 미워하나?
마음이 아팠다. 날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온 마음으로 신뢰한 사람들이, 누구보다 날 잘 아는 사람들이 어째서 가장 잔인한 걸까.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닌데, 첫째를 택한 적도 없고, 조부모님을 닮겠다고 마음먹은 적도 없고, 욕심쟁이나 피해의식에 찌든 "정신병자"가 되겠다고 선언한 적도 없는데. 내가 바란 것은 대단한 지원도, 대장 대접도 아닌 존중과 애정이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미우면 이러는 걸까. 호구 소리 들으면서, 뭣하러 사람한테 그렇게 정성을 들이냐는 지청구를 먹으면서 살아왔어도 부족했던 걸까. 고치겠다면서 갈피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 꼴이 한심했다.
사족으로, 그때 난 흉은 지금도 남아있다. 당시 가족과 주변인들은 '그거 왜 그래'라고 슬쩍 묻고 넘어갔다. 웅얼웅얼 묻는 그들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해서, 배구하다가 손을 다쳤다고 둘러댔다. 코트에서 하는 운동에 왜 손등이 찢어지는지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굳이 더 캐묻고 싶어 하지 않았다. 딱 그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