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공시생 잔혹사 - 6

by pajaroazul

공시생 잔혹사-6공시생 잔혹사-6

단도직입적으로 고백한다. 공부가 싫다. 책만 펴면 5분 내로 하품이 시작된다. 집중력은 길어야 2시간이다. 인내심? 독기? 집념? 내 사전엔 없다. 체력은 또 어떤가. 척추 측만증에 약한 위장, 스트레스가 바로 몸으로 발현되는 개복치. 성인이 되면 덜 할 줄 알았거늘, 이제는 시험을 볼 때마다 공황발작이 올까 봐 두렵다. 이 정도면 공부하지 말라고 태어난 것 같다. 신이 있다면 고약한 취미를 가진 게 틀림없다. 다른 재능이라도 주시든가, 아니면 한국은 피해서 배정하시지. 이게 뭐람.


이 땅의 수험생들 중 8할은 공부가 적성이 아닐 거라 생각한다. 아직 적성을 못 찾아서, 혹은 맞지 않는 걸 알면서도 공부를 선택했을 것이다. 난 후자였다. 학창 시절, 남들과 똑같은 공부와 시험에도 유달리 힘들어하자 주변에선 과민반응이라고 꾸짖었다. 나 또한 그렇게 믿었다. 나약해서 징징거리는 거라고. 너만 힘드냐고. 다들 이렇게 살아가니까 견디라고. 스스로를 갈아 넣지 않으면 성적이 갈릴 거라는 협박을 해가며 책상 앞에 앉았다. 사람이 무슨 과일 채소도 아닌데, 누르고, 갈고, 쥐어짜고... 난리도 아니었다. 집중이 안되면 벽에 머리를 박았다. 초조해질 때마다 머리카락을 꼬는 바람에 머리가 늘 개털이었다. 성적이 나쁘면 팔 안쪽을 긁거나 허벅지에 멍이 들 때까지 때렸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못난 걸까? 머리가 나쁘면, 독하기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뭐 이런 등신이 다 있지?


한 가지 명확히 하겠다. 세상의 모든 공부를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호기심이 많아 잡학 다식했고, 시키지 않을 때 더 부지런히 움직이곤 했다. 중학생 때 교과목 공부는 안 하고 책만 읽어대는 통에 어머니가 책을 압수하신 적도 있었다. 친구들이 자소서를 위해 참여하는 교내 대회에 심심하단 이유로 나가 상을 차지해버리는 인간이었다. (학생부 전형은 쓰지도 않는 주제에 말이다.) 한편, 제한 시간 안에 외운 것을 뱉어내거나, 압박 상황에서 평가받는 데는 쥐약이었다.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확실한 목적을 찾지 못하면 손 하나 까딱하기 싫어했다. 단조로운 일들은 내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학생들이 깔렸을 텐데, 굳이 경쟁에 끼어들어 몸과 정신을 버려야 하나? 공부란 꼭 이런 식으로 해야 하는 건가? 세상에 나 같은 인간이 있을 자리란 없나?


혹자는 '공부가 힘들고 안 맞는 건 알겠는데, 그 정도로 비약할 필요가 있었나?'라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도 그렇게 했기 때문에 이 정도의 성과가 있었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노력이나 지능 대신 고통 속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심리를 이용해 '상위권'의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자신을 향한 온갖 협박('이걸 못하면 넌 평생 어중간하게 시험이나 치며 살아야 할 거야')과 회유('이것만 해내면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어')는 돌아보건대 순진하기 짝이 없었다. 주변은 내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아챌 만큼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설령 그랬다 한들 성적이 잘 나오니 아무 말하지 않았다. 잘못된 방식을 눈치채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주변인들의 침묵이 무서웠다. 몇 초 만에 정신을 벼랑으로 몰 수 있는 스스로의 잔인함이 무서웠다.


공부가 싫은 게 아니라, 공부할 때의 내가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