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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병진 Mar 27. 2019

드라마 '눈이 부시게' 샤넬 할머니의 정체는 무엇일까?

주인공 혜자처럼 상상해보았다.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가 종영했던 날, 그날부터 이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종영 후에 나온 기사로 알게 된 주인공 혜자의 정체 때문이다. 모든 게 알츠하이머 노인의 상상이었다는 결론이 흥미로웠다. 나는 ‘눈이 부시게’가 영화 ‘수상한 그녀’의 역버전에 해당하는 이야기일 거 같아 굳이 보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그게 모두 상상이었다면, 이 드라마는 그런 반전을 어떻게 설득했을까, 가 내가 가진 호기심이었다. 나의 호기심에 비해 ‘눈이 부시게’는 설득의 방식에 많은 공을 들이지는 않았다. 설명해야 할 많은 부분이 있지만, 이 드라마는 그것 모두 혜자의 상상이라는 설정으로 밀어붙인 후 배우 김혜자의 존재감으로 더 이상의 질문을 차단시켜버린다. 주인공 혜자의 과거와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현재의 혜자를 보여주는 11회 이후로는 그저 눈물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혜자뿐만 아니라 혜자가 입원한 요양병원의 다른 환자들이 가진 사연을 보여줄 때도 마찬가지다. 무리수의 전개라고 생각했지만, 배우 김혜자 때문에 더 이상의 질문은 생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계속 생각해보게 되는 질문이 생겼다. 배우 정영숙이 연기한 샤넬 할머니의 정체다. 

샤넬 할머니는 '프라하 할머니'로 불리며 프라하 모텔에 장기 투숙하고 있다. 아들은 미국에 갔는데, 연락이 끊긴 지 오래다. 하지만 연락이 끊긴 줄도 모르고 있다. 마을 효도관에서 일하는 이준하는 샤넬 할머니에게 위안을 얻었고, 그 후로 계속 그녀를 선의의 거짓말로 도와준다. 샤넬 할머니는 몰래 한국에 돌아와 살던 아들의 집주소를 얻어내 그를 만나지만 결국 상처만 받는다. 그녀는 보험 수혜자를 이준하로 등록해놓고 생을 마감한다. 이때 그녀가 남긴 편지에 감동적인 한 마디가 있다. "다음에 우리가 또다시 만난다면은 그때는 내가 꼭 이준하씨 엄마로 태어날게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그런데 이것도 주인공 혜자의 상상이었다(는 게 ‘눈이 부시게’의 설정이다). 


'눈이 부시게'는 마지막 11회와 12회, 2회에 걸쳐 혜자가 지금까지 상상해낸 이야기들에 얽힌 사연을 보여준다. 젊은 시절 이준하와 나누었던 사랑과 그녀의 가족,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여기에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 아들에 대한 죄책 감등이 섞여있다. 또한 1회부터 10회까지 보였던 혜자의 상상 속에 등장한 인물들이 모두 실제 혜자의 가족이거나, 친구이거나, 같은 병원에 있는 환자와 의료진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드러나지 않은 인물들도 드라마를 본 사람이라면 정체를 추측할 수 있다. (젊은)혜자의 엄마가 경영하는 미용실을 드나드는 손님들은 아마도 그 동네의 실제 손님들이었을 것이다. 드라마 초반에 등장하는 대학 동기와 선배들의 정체는 나오지 않지만, 실제 혜자가 아나운서를 꿈꾸었던 대학생이라는 설명이 나오니 실제 그녀의 선, 후배들이라 볼 수 있다. 준하의 할머니(김영옥)도 밝혀지지 않지만, 아마도 실제 이준하에게는 그런 할머니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샤넬 할머니의 진짜 정체는 추측할 수 조차 없다. 혜자가 '샤넬 할머니'란 인물을 상상하게 해 준 실제 인물은 누구일까? 드라마상에서 그녀는 혜자의 친구도 아니고, 같은 병원에 입원한 환자도 아니다. 동네 사람도 아니다. 젊은 시절 마주쳤던 인물도 아니다. 11회와 12회 어디에도 샤넬 할머니에 대한 정보는 없다. 이 드라마의 전개에서 핵심적인 인물 중 한 명이었는데도 없다. ‘노벤져스’ 멤버들의 정체도 나오는데, 샤넬 할머니에 대한 정보만 없다. ‘눈이 부시게’는 샤넬 할머니에 대한 정보를 생략해버렸다. 

그런데 왜 생략했을까? 


여러 가능성이 있다. 샤넬 할머니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가 있었지만, 분량이 길어져 뺐을까? 그게 아니라면 처음부터 넣을 생각이 없었을까? 전자의 경우라면 아쉽고, 후자의 경우라면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적어도 이 드라마를 쓰고 연출하는 사람들은 샤넬 할머니의 정체에 대해 논의해봤을 테니까. 만약 그게 아니라면 이 드라마는 샤넬 할머니의 정체를 드러내고 있다는 가능성밖에 없다. 비록 시청자는 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물론 어떤 논의를 했든, 지금의 결과물에는 무리수가 있다. 


좀 더 냉철한 척을 해보면 드라마 제작진이 분량 문제로 샤넬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뺐을 것 같다. 하지만 '눈이 부시게'란 드라마를 좋아하는 입장에서는 3번째 가능성에 매달리고 싶어 진다. 시청자는 보지 못했지만, 드라마는 보여준 샤넬 할머니의 정체가 있지 않을까? 나는 이 드라마의 전개와 연출 방식을 토대로 볼 때, 샤넬 할머니의 정체는 주인공 혜자 자신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눈이 부시게’에서 혜자의 상상은 모든 걸 가능하게 한다. 밤 9시면 잠에 빠지고, 거동도 불편하고, 앞을 볼 수도 없는 노인들이 거구의 덩치들과 상대해 사람들을 구해내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걸 보면 이 상상에 불가능은 없다. 게다가 혜자는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벌이는 별개의 이야기도 상상한다. 오빠와 친구의 마음이 오고 가는 이야기도 상상하고, 효도관 운영진이 벌이는 악행의 서사도 상상한다. ‘모든 게 상상이었다’는 반전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알고 보니 소설이었다’(ex, ‘파리의 연인)는 식의 설명을 붙인다. 그래야만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사연이 상상이었다는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면 상상의 주체(이 드라마에서는 혜자)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눈이 부시게’는 그런 설정과 연출 없이 그냥 모든 게 혜자의 상상이었다고 밀어붙인다. 이런 상황이니 혜자가 스스로 자신을 투영시켜 샤넬 할머니를 상상은 불가능한 게 아니다. 

1회부터 10회까지 이어지는 이야기의 상당 부분은 혜자가 아들에게 가진 죄책감과 남편에 대한 미안함에서 비롯된 상상이다. 이 이야기에서 혜자는 나이 든 노인으로서 손자뻘의 남편인 준하를 보듬고 위로한다. 납치된 준하를 구하는 장면은 아마도 과거의 혜자가 실제 가졌던 감정에서 비롯된 상상일 것이다. 과거의 사연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혜자의 시선에 볼 때 남편 준하와의 행복한 기억만 전개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의문사를 당한 준하는 사실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고 있었을지 모른다. 남편의 죽음 앞에 혜자는 황망해하고, 그녀는 “혼자 가게 해서 미안해”라며 눈물을 흘린다. 어쩌면 그녀가 가진 미안함은 준하가 혼자 견뎠을 두려움과 공포를 살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볼 때, 알츠하이머 상태의 혜자는 샤넬 할머니란 또 다른 인물을 통해 이준하의 다른 이면을 보고 싶어 했을 수도 있다. 과거의 자신은 볼 수 없었던 준하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창구로 샤넬 할머니를 만든 거라면? 무리수 같은 상상이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눈이 부시게’는 모든 상상이 가능한 드라마다. 샤넬 할머니가 남긴 "또다시 만난다면은 그때는 내가 꼭 이준하씨 엄마로 태어날게요"란 말 또한 혜자가 죽은 남편에게 갖고 있었을 마음일 가능성이 크다. 

이때 더 흥미로운 건, 혜자가 상상한 샤넬 할머니의 운명이 매우 비극적이라는 것이다. 아들에게 상처 받고, 동시에 세상에 상처 받은 후,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운명이라니. 혜자가 정말 샤넬 할머니를 자신에 빗대어 상상했다면, 왜 그녀의 운명을 그토록 비극적으로 상상했을까. 역시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상상하면, 실제 혜자도 샤넬 할머니와 같은 생각을 했던 때가 있었을 것 같다. 사랑하는 남편은 하루아침에 주검이 되어 돌아왔고, 먹고살기 위해 바쁘게 일하느라 혼자 두었던 아들은 사고를 당해 다리를 잃었다. 당시의 혜자는 아들과의 동반자살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또 그때의 비극적인 감정이 샤넬 할머니를 통해서 그려졌을 수도. 이렇게 본다면 샤넬 할머니(정영숙)는 젊은 혜자(한지민)보다도 더 혜자의 깊은 속내를 드러내는 상상의 캐릭터일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눈이 부시게'에서는 상상으로 모든 게 가능하다. 물론 이것도 어디까지나 나의 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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