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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병진 May 01. 2021

'삐사쿠'의 미학

'삐사쿠'라는 말이 있다.

‘삐사쿠’라는 말이 있다. 영화판에서 쓰는 은어로 알려져 있다. 옛날 영화판 은어들이 그렇듯 삐사쿠도 일본식 말이다. 쉽게 알아듣는 말은 아니다. 영화업계 사람들은 다 알지만, 영화를 전공하는 사람이나 영화 동아리 생활을 하는 사람은 2년 차에서 3년 차 정도 넘어갈 때 주워듣고 그리고도 한 2년 반 후에야 개념을 알게 되는 그런 말.


우리는 삐사쿠를 그런 말로 정의했다.


나와 친구 이태안이 ‘삐사쿠’를 떠올린 건 1999년 2월쯤이었다. 98학번인 우리에게는 곧 영화 동아리 후배들이 생겼다. 나는 4월에 입대를 앞두고 있었지만, 그래도 후배들을 만나고 간다는 생각에 설렜다. 태안이도 설렜다. 우리는 설레고 설레서 후배들에게 어떤 선배로 보여야 하는가를 놓고 긴 대화를 했다. 후배들이 우러러보는, 멋있게 보는, 그래서 선망하는 선배가 되는 방법은 명확하다. 밥을 많이 사주거나, 술을 많이 사주면 된다. 자신이 가진 지식을 늘어놓아도 좋다. 나중에 알았지만 동기 중 한 녀석은 후배들에게 피자를 자주 사주었다고 한다. 혼자 있을 때도 피자를 먹고, 후배들에게도 피자를 자주 사고, 그렇게 모은 피자 쿠폰으로 또 피자를 사주곤 했다. 하지만 나와 이태안에게는 그럴 만한 돈도, 그럴만한 지식도 없었다. 그래서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척할 수 있는 영화 용어를 떠올린 것이다. 후배들에게 너희들은 아직은 모르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고 뻐길 수 있는 말. 우리는 온갖 발음을 조합했다. 옹씨몽. 망말이. 삼바동.... 킥킥거리던 와중에 태안이가 말했다. “삐사쿠?”


삐사쿠...  뭔가 일본식 어감 같고 그래서 정말 은어 같은 조합이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현장에서 일하셨다는  정일성 촬영감독님이 일본 촬영 현장에서 듣고 한국에서도 쓰다가 구전으로 이어졌을 법한 느낌의 조합이랄까. 하필 끝 부분이 일본어처럼 ‘쿠’(ク)로 끝나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래 이걸 가타카나 표기로 적어서 ‘ピサク’라고 하자. 이를테면 우리가 후배들 앞에서 뭔가 하고 있을 때 우리끼리 이렇게 말해보는 거야. “야, 여기 뭔가 좀 부족한 거 같은데?” 그럼 이렇게 답하는 것이다. “여기 삐사쿠가 좀 모자르네.” 혹은 “여기 삐사쿠를 좀 더 줘 볼까?” 당구에서 “시내루를 좀 더 주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용례를 만들어 갔다.

원래 사진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요짐보' 촬영현장

용례만으로는 부족했다. ‘삐사쿠’는 아무런 뜻이 없는 말이었지만, 후배들을 완벽히 속여 우리가 허세를 취하기 위해서는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해도 우리끼리는 약속한 의미가 필요했다. 나와 태안은 우리가 영화 동아리 생활 중 가장 자주 하고 있는 것들을 나열했다. 우리 비디오데크랑 모니터 연결 자주 하잖아! 그래 그럼 ‘삐사쿠’를 그때 써보자! 후배들 앞에서 비디오와 모니터를 연결할 때 네가 “야. 지금 삐사쿠가 안되는데?”  이러는 거야. 그럼 후배들이 묻겠지. 선배 ‘삐사쿠’가 뭐예요? 그럼 이렇게 답하는 거야. “연결 단자가 아웃에서 나와 인으로 연결되어야 하잖아? 이때 비디오 선과 오디오 선 사이에 물리적 조응이 있어야 돼. 그걸 만드는 게 삐사쿠야”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부끄럽다. 그냥 여기저기서 주워 단어들을 조합하니 그럴싸한 말이 됐다. 그래도 그걸로 부족하다고 여긴 우리는 또 다른 의미들을 만들었다. 


그건 관객의 입장에 대한 용어인데, 

영화의 소격 효과가 극에 달했을 때 관객의 동공이 커지는 현상을 말하는 거란다.


카메라로 촬영을 할 때 사랑의 감정을 실어서 피사체의 농도를 높이는 거야. 

말하자면 메소드 촬영의 한 분과라 할 수 있지.


우리는 그날 ‘삐사쿠’의 의미를 만드는 동안 무척 신이 났다. 하지만 결국 후배들에게는 한 번도 써먹어 본 적이 없다. 신이 나기는 했어도 정말 그러기에는 너무 쪽팔렸던 것이다. 대신 우리는 이후 20년 동안 우리 둘 만 있을 때 ‘삐사쿠’를 즐겨 썼다. 누군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다고 하면 “그 녀석 삐사쿠가 있는 놈이었네”라고 했다. 또 누군가가 집을 샀다고 하면 “이 녀석 삐사쿠네”라고 했다. 어떤 후배가 운동하다가 다쳐서 수술을 받았다는 소식에도 “이런 삐사쿠 같은 자식”이라고 했다. 일종의 ‘거시기’처럼 우리에게 삐사쿠는 아무런 뜻도 없지만 모든 뜻을 가지고 있는 그런 말이 되었다. 


얼마 전 나와 이태안은 오랜만에 삐사쿠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냥 조합된 말이라고 할 수도 없는 발음이지만. 왜 우리는 그렇게 삐사쿠를 좋아했던 걸까. 우리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있어 보이려고 했던 게 아닐까? 아니 우리는 사실 있어 보이고 싶었을 뿐, 있어 보이려고 한 적이 없어. ‘삐사쿠’를 후배들에게 써먹지도 않았잖아. 그러고 보면 삐사쿠는 뭔가 있어 보이고 싶은 허세가 아니라 허세를 상상할 때의 신남. 그걸 뜻하는 건지 몰라. 이 대화는 결국 우리가 20살 이후 20년의 삶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이 그런 허세를 선망하는 신남 때문이었을 거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허세를 이루지도 못했지만 그걸 갈망하는 마음 만으로도 즐거울 수 있는 거라고. 어쩌면 남은 인생도 우리는 삐사쿠로 살지 모른다고. 그렇게 우리는 20년 전의 ‘삐사쿠’ 때문에 다시 웃었다. 그러고 보면 20년 전의 태안이가 옳았다. 삐사쿠는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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