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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병진 Jul 19. 2018

정치가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 미치는 영향

영화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2003)

우연히 15년 전의 영화를 한 편 봤다. <왓 위민 원트>(2000)와 <로맨틱 홀리데이>(2006), 그리고 <인턴>(2015)을 연출한 낸시 마이어스 감독의 2003년 작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이다.


잭 니콜슨, 다이앤 키튼과 같은 중년 배우, 아니 사실상 노년인 배우들이 출연한 로맨틱 코미디인데, 사실 개봉 당시 제작된 한국 극장용 포스터는 이 영화가 두 노인의 사랑 이야기라는 점을 애써서 강조하지 않았다. 영화에 등장하는 젊은 배우인 아만다 키즈와 키아누 리브스의 얼굴까지 드러내어 마치 가족 코미디 영화인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낸시 마이어스 감독이 ‘신부의 아버지’나 ‘페어런트 트랩’ 같은 영화로 가족 코미디에도 일가견을 보여준 적은 있지만,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은 아니다. 이 영화는 ‘진짜’ 로맨틱 코미디다. 


영화는 화려한 파티장과 거리를 누비는 다양한 젊은 여성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을 탐닉하듯 바라보는 한 남자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젊은 여자가 주는 달콤한 행복감. 덧없이 짧은 그 눈부신 젊음 앞에 모든 남자는 노예처럼 무릎을 꿇는다. 내 별명은 ‘영계 전문 선수’. 하긴 경력이 40년이나 된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유명한 힙합 프로덕션의 대표인 해리 샌본이라는 남자다. 잭 니콜슨이 연기한 이 남자는 실제 잭 니콜슨처럼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여성들과만 데이트를 해왔다. 그리고 이제 최근에 만난 젊은 여성과 그녀의 어머니가 가진 별장으로 가는 길이다. 


영화는 이러한 남자가 평소에는 생각하지도 않던 자기 또래의 노년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극 중에서 그와 사랑에 빠지는 여성은 유명한 극작가인 에리카 배리(다이안 키튼)다. 여름에도 목 부분을 덮는 티셔츠만 입고, 언제나 우아한 표정을 잃지 않는 그녀는 처음 딸의 늙은 남자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해리의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엉겁결에 에리카가 그를 보살피게 되면서 두 사람은 조금씩 가까워진다.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에 대해 당시 미국 CNN은 "최근 몇 년 동안 나온 영화 중 최고의 성인용 로맨틱 코미디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어른이지만 자라지 않은 남자, 그런 남자와 불편한 관계에 놓인 여자. 서로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두 사람이 어떤 계기에 의해 사랑에 빠졌다가, 또 삼각관계로 갈등하고, 그랬다가 다시 사랑을 확인하는 건 분명 수많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공식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미덕은 늙어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젊은 관객들도 좋아하도록 애쓰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직접 각본을 쓴 낸시 마이어스 감독은 이들의 설레는 감정과 유머를 리얼하게 상상한다. 젊은 사람들의 관계에서는 나오기 힘든 솔직한 대화와 유머, 그리고 감동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이처럼 아름다운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보면서 ‘정치’라는 두 글자를 떠올렸다.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과 같은 영화가 한국에서도 가능할까, 생각하다가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정치는 그 나라의 영화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정치가 바로 관객의 성향을 만들기 때문이다. 정치에 의해 한 나라의 경제수준과 교육수준이 결정되고, 이는 관객의 생활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에 따라 관객들이 영화에게 원하는 것이 달라진다. 이것을 ‘트렌드’라고 부른다. 

영화를 기획하고 만드는 사람들은 ‘트렌드’를 간파하고, 그에 맞춰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소재의 영화를 구성한다. 흔히 영화는 만드는 이들의 예술이라고 하지만, 대중영화의 시스템에서는 영화 또한 수요가 결정하는 셈이다. 이렇게 볼 때 로맨틱 코미디는 수많은 영화의 장르 중에서도 정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영화 장르일 것이다. 일단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관객들과 함께 했던 시기를 돌아보자. 한국에서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대거 등장했던 시기는 1990년대 중반이었다. <닥터봉>, <패자부활전>, <키스할까요> 등등. 물론 이들은 멕 라이언의 영화를 비롯한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를 벤치마킹했는데, <유브 갓 메일>이나 <애딕티드 러브>, <프렌치 키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등 그녀의 작품이 한국에서 사랑받았던 시기도 바로 1990년대였다. 


이후 2000년대에 들어와서 배우 엄정화를 통해 <싱글즈>(2003),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2004), <Mr. 로빈 꼬시기>(2006) 등이 등장했고, 다른 쪽에서는 김정은을 통해 <불어라 봄바람>(2003)과 <내 남자의 로맨스>(2004) 같은 영화들이 나왔다. 그런데 지금은 어떨까? 지금 소셜미디어에서 거론되는 한국 영화에 대한 불만은 “왜 남자들이 나오는 범죄 영화 밖에 없냐” 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 영화만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런 비난에 자신 있게 반론을 제기할 만큼 그런 영화가 적은 것도 아니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매력은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오로지 사랑에만 골몰한다는 데에 있다. 먹고사는 문제에 크게 걱정이 없는 직업을 가진 인물들로 설정된 덕분이다. (<어바웃 어 보이>의 윌 프리먼(휴 그랜트)이 작곡가 아버지가 남긴 저작권으로 먹고사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경제 호황 시절의 로맨틱 코미디들은 그때 가장 트렌디하고, 세련된 공간들을 찾아다니며 전시한다. 


노년의 사랑을 그린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의 두 남녀 또한 각각 음악 프로듀서와 극작가로 성공한 사람들이고, 이들은 아름다운 해변가에 세워진 근사한 집에서 사랑에 빠진다. 말하자면 ‘로맨틱 코미디’는 어디까지나 관객에게 판타지를 제공하는 장르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장르의 영화가 더 이상 기획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지금의 관객들은 한국 영화에서 아무런 고민 없이 사랑에만 골몰하는 주인공을 보고 판타지를 느끼거나, 공감할 수 있는 여유가 없다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그게 노년의 사랑 이야기라면?? 


최근 그런 영화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강풀 작가의 동명 원작을 영화화한 <그대를 사랑합니다>(2011)와 윤여정, 박근형 주연의 <장수상회>(2015) 또한 황혼의 로맨스를 그린 영화였고, 나름 흥행을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이 영화들 또한 로맨스에 대한 완벽한 판타지를 제공한 작품은 아니다. 결국에는 노인들이 처한 생활고와 질병이 갈등의 화두였고, 이를 통해 슬픔의 눈물을 자아냈다. 아마도 관객들은 그러한 대목에서 영화의 현실성을 높게 평가했을 것이다. 


반대로 한국의 노년 배우들을 캐스팅해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과 같은 로맨틱 코미디를 만들었다면, 관객들은 현실적이지 못한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여길 것이 분명하다. 현실적이지 않은 이야기지만, 이것을 판타지로 보고 즐기지도 않을 것이다. 당연한 것 같지만, 슬픈 예상이다. 나름 시간을 할애해 돈을 주고 보는 영화에서 한국의 관객은 판타지조차 마음 놓고 즐기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한국에서 영화를 만드는 이들도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같은 작품을 섣불리 기획하기 어려운 것이다.


성공적인 정치를 가늠하는 데에는 여러 기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공적인 정치의 효과는 그렇게 빨리 파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성공적인 정치가 경제 수준을 높이고, 그에 따라 생활수준이 올라가고, 또 그에 따라 국민들(관객들)이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된다면, 그에 따른 새로운 트렌드를 파악한 영화인들에 의해 한국 영화의 장르 다양성도 변화하게 될 것이다. 역으로 지금 비슷한 시기에 나오는 비슷한 영화들에 불만이 있다면, 그건 이 나라의 정치에 대한 불만과 통할지 모른다. 이는 또한 장기적인 관점에서 선거를 통해 한국 영화의 성격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당장 눈앞의 선거 결과가 10년 후, 극장가의 풍경을 바꾸어 놓을지도 모른다. ‘남자들만 나오는 범죄 영화’ 가 많은 나라는 일단 그리 좋은 정치의 결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한국의 관객에게는 지금 ‘사랑’이 아닌 ‘정의’와 ‘단죄’가 판타지인 걸까?. 그렇다면 그건 정의롭지 못한 정치를 보았던 기억 때문일 것이다.


*2017년 11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블로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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