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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병진 Jul 17. 2018

연애 6년차, 장거리 연애 1년차

지구 반대편으로 여자친구를 보낸 남자는 혼자 어떻게 노는가

유학을 보낼 게 아니라, 결혼을 했어야 했다. 그때도 생각을 안했던 건 아니다. 이대로 헤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곁에 없어서 겪게 될 상실감, 무엇보다 그녀가 지구 저 편에서 주인 없는 고양이 마냥 죽쳐져 지낼 것 같은 안쓰러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유학을 가겠다는 그녀의 다리를 붙잡기는커녕, 공항까지 배웅을 했던 이유는 변명할 필요도 없이 ‘비겁함’ 때문이었다. 그녀가 유학을 가서 얻는 기회비용과 나와 결혼하면서 얻는 기회비용이 비슷하기라도 할까? 결혼에 관해서는 아무런 준비를 못한 나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어쨌든 그녀는 울면서 떠났다. 나도 울면서 보냈다. 벌써 1년이 지났다.


<레이디 호크>란 영화가 있다. 사랑하던 남녀가 저주에 빠진다. 낮이면 여자는 매로 변하고, 밤이면 남자가 늑대로 변한다. 함께 있어도, 사람일 때는 도저히 만날 수 없다. 그녀의 유학 이후, 우리는 스카이프와 카카오톡, 페이스북 쪽지를 이용해 대화했다. 하지만 우리의 관계에도 시차 상 겪을 수밖에 없는 문제가 생겼다. 내가 잠들려고 할 때, 그녀는 이제 막 지는 해를 바라본다. 내가 출근을 하려할 때, 그녀는 잠이 든다. 서로에게 가장 감성적인 시간이 상대방에게는 가장 날카로운 시간인 것이다. 조금이라도 긴 통화를 할 수 있는 프라임 타임은 한국기준으로 볼 때, 주말 저녁 7시 정도였는데, 그나마도 내가 술자리에 있을 때는 목소리로만 잠깐 대화를 했다. 별 이야기를 한 건 아니다. “너 어디야?” “동네 애들이랑 술 마셔.” “또 여자들 만나는구만.”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 “뻔하지 뭐.” 그녀는 내가 하지도 않은 짓을 했다고 가정하면서, 내가 딴 짓을 못하게 경고하곤 했다. 평상시에는 각자의 생활에서 흥미롭게 느낀 에피소드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다. 또 때로는 사는 게 힘들다며 고통을 털어놓기도 한다. 눈물을 닦아줄 수도, 어깨를 다독일 수도, 포옹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내 밑바닥을 다 드러낼 수 있는 곳은 지구 저편의 그녀뿐인 게 사실이다.


여자 친구가 유학을 떠난 지 4개월 쯤 되자, 사람들은 이제 그녀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 대신  “바람 피워 본 적은 없냐?” 묻곤 했다. 쉽게 말해 다른 여자랑 잔 적이 없냐는 건데, 나로서는 평범한 30대 중반 남자가 주위의 여성에게 가질 법한 관심 정도만 있을 뿐, 그런 적은 없다. (거짓말 아니다. 진짜다.) 연인과의 암묵적인 약속 때문이기도 하지만, 솔직히 귀찮고 피곤한 게 이유다. 일단 원나잇 스탠드를 노려볼 만큼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것도 아닌데다, 시끄러운 곳을 싫어하는 성정상 불금의 클럽을 가지도 않는다. 그럼 아예 새로운 연애의 시작? 서로의 눈치를 보고 밀었다가 당기기를 반복하는 과정을 또 다시 해야 한다고? 그 또한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그럼 시간이 날 때 무엇을 하냐고 묻는다. 퇴근 후에는 동네 형이 소시지를 구워주는 호프집에서 500CC 한잔을 놓고 그날의 야구 하이라이트를 본다. 퇴근을 좀 일찍 한 날에는 대학 동기 녀석과 만나 술을 마시며 잡담을 늘어놓는다. 주말에는 딱 두 가지를 한다. 운전과 야구. 여자 친구가 곁에 없었던 지난 1년 동안 나는 운전면허를 땄고 중고차 한 대를 내 명의로 돌려놓았다. 관심도 없는 야구에 취미가 생겨 2개의 글러브와 5개의 야구공, 15권의 야구관련서적, 한 벌의 배팅점퍼와 또 한 벌의 야구 훈련용 후드티를 구입했다. 덕분에 주말이면 파주와 양수리로 드라이브를 가기도 하고, 친구가 사는 미사리로 가서 초계국수를 먹고 오기도 한다. 또 때로는 동네 친구를 차에 태워 한강고수부지로 나가 캐치볼을 한다.  


특히 야구에 맛을 들이면서 나는 “그때 유학을 보내지 말고, 결혼을 했어야 했다”는 후회를 다시 시작했다. 빨리 결혼을 해서, 빨리 아들을 낳았으면, 머지않아 아들과 캐치볼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한강고수부지에는 아들과 캐치볼을 하는 아빠들이 어찌나 많던지. 이런 얘기를 들은 스카이프 너머의 그녀는 “넌 더 외로워 봐야해”라고 말한다. 그래야 더 크게 후회할 거라고. 또 그래야 자신의 소중함을 느끼게 될 거라고. 이미 그러고 있다.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야구공을 던져야 그녀가 돌아올는지. 나는 바람도 안 피우고, 남자와만 술 마시고, 남자와만 야구하며 때로는 아예 혼자 놀면서 잘 지내고 있다. 너는 전화라도 제때 좀 받아라.


*이글은 패션지 <그라치아> 2013년 10월호에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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