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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병진 Jul 17. 2018

'응답하라 1988'의 덕선을 사랑하지 못한 이유

'네멋대로 해라'의 전경 때문이다. 

<응답하라 1988>이 방영하는 동안 여자친구는 “택이가 좋다”는 말을 반복했다. 택이가 덕선에게 달려들어 키스할 때는 카톡창이 마구 울렸다. “봤어? 봤어?” 그래 봤다. 다 보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나두 덕선이가 좋아!”라고 말하지 못했다. 여자친구는 택이를 좋아해도 되지만, 나는 덕선이를 (좋아해도) 좋아한다고 말하면 안 되는 게 순탄한 연애를 유지하는 불문율이니까. 그리고 솔직히 나는 여자친구의 카톡창을 도배할 만큼 덕선이가 좋지 않았다. 여성 시청자들이 정팔이와 택이를 좋아한 이유는 류준열과 박보검처럼 생긴 남자가 그녀에게 사랑을 주기 때문이다. 이건 남성 시청자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나 역시 <응답하라 1988>을 보는 동안 소주 한 잔을 원샷한 것 같은 감탄사를 내뱉는 순간은 대부분 정팔이와 택이가 덕선이에게 사랑을 주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덕선이는 구김살 없는 성격에, 택이와 같은 사회 부적응자를 보듬어 줄 수도 있는 따뜻한 마음에, 혜리 같은 외모를 가졌을 뿐, 누구에게 사랑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가 아니었다.  


덕선이의 사랑은 먼저 시작되지 않고, 상대의 사랑을 넘어서지도 않는다. 이건 한국에서 방영되는 TV 드라마가 가진 유구한 공식이다. 그런데 이 공식을 넘어선 몇 번 안 되는 사례 중 하나가 2002년에 방영된 <네 멋대로 해라>였다. 주인공은 소매치기 전과자인 고복수. 복수는 교도소를 나온 후에 또 소매치기를 한다. 그러다 인디밴드의 키보디스트인 전경의 가방에서 돈을 훔친다. 그런데 그 돈은 병에 걸린 친구를 위한 치료비였고, 복수가 이 돈을 훔쳐간 터라 친구는 죽고 만다. 전경에게 관심을 가진 복수는 정체를 숨긴 채 그녀를 만난다. 결국 복수는 정체를 털어놓지만, 드라마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사이 전경은 복수를 사랑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수는 뇌종양 판정을 받는다. 복수를 향한 전경의 사랑은 이때부터 거의 폭주한다.


2002년 당시의 나는 예비역 복학생이었다. 대학에 적응을 못 한 건 아니었다. 그냥 외로웠다. 딱히 먼저 여자에게 다가설 마음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때 TV에서 전경을 만난 것이다. 만남의 시작은 복수에 의한 것이었지만, 전경은 관계의 시작을 이끌고 간다. “내가… 좋아해도 되나요?” 경찰의 손가락을 자른 복수의 어두운 과거마저도 전경은 기꺼이 끌어안는다. “그 험한 기억이 복수씨가 살아왔던 현실이라면, 난 그것도 좋아할래요. 내가 보지 않은 건 생각 안 할래요. 난 누가 뭐라든 계속 복수씨 손잡고 있을래요. 난 복수씨 손이 좋아요.” 그리고 전경은 불치병 판정을 받은 복수가 남은 인생을 유감없이 살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여자였다. “복수씨, 그냥 사는 동안 살고 죽는 동안 죽어요. 살 때 죽어있지 말고, 죽을 때 살아있지 마요. 남자인 동안에 남자로 살고, 장애인인 동안에 장애인으로 살아요. 내가 애인인 동안에 애인으로 살고, 내가 보호자인 동안에는 보호자로 살래요. 지금 사는 것처럼, 지금을 살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전경은 이나영처럼 생긴 여자였다. (솔직히 이게 가장 결정적이다.)


전경이 복수에게 하는 사랑의 말들은 복수가 마음속으로는 간절히 원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는 내뱉지 못하는 말들이었다. 나는 가진 게 없는 전과자인데, 그녀를 사랑해도 될까? 싶은 순간, 전경은 먼저 좋아해도 되냐고 말한다. 보여주고 싶지 않은 과거를 들킨 순간, 복수는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겠지만 전경은 먼저 그의 손을 잡는다. 심지어 죽음을 앞두었을 때도 전경은 먼저 자신을 사랑하다가 죽어도 된다고 말해주는 여자다. 복수의 심정에 이입했던 당시 24살의 나는 그렇게 먼저 날아오는 전경의 한 방에 눈물이 났다. 남자는 이기적이고 또 이기적인 주제에, 매우 소심한 동물이라 먼저 이기적이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경을 사랑한 이유가 이런 것이었다고 하니, 대부분의 여자들은 전경이 복수로부터 진심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럴 거다. 복수 같은 남자만이 전경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복수가 전경이 지닌 상처를 보듬은 덕분에 그녀의 멘탈이 그토록 강해진 것이다. “마음이 튼튼해졌어요.” 위기가 왔을 때, 먼저 내 등에 등을 맞대고 같이 싸워보자고 할 여자. 전경은 그처럼 사랑스럽게 튼튼한 여자였다.


*이 글은 패션지 '그라치아'에 기고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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