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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병진 Jul 19. 2018

영화 '족구왕'과 지금은 사라진 복학생들

대학시절, 족구를 할 때면 우리는 '군입대'를 기준으로 편을 나누었다. 현역입대가 한 팀, 그외 나머지가 한 팀. '그외 나머지'에는 상근, 공익, 면제 등이 포함됐는데, 예비역 후배들은 현역으로 입대해 4.2인치 박격포를 메고 전방근무까지 한 나를 '그외 나머지'로 분류했다. 약 1달간의 사단의무대 입실경력, 그리고 주둔지와 GOP를 오가던 군생활 덕분에 운 좋게도 유격훈련 한 번 뛴 적이 없던 이력을 걸고넘어진 것이다. 어쨌든 복학을 했더니, 먼저 복학한 선배들이 있었고 1년쯤 지나니, 복학한 후배들이 생겼다. 그렇게 만난 복학생들이 모여 군대 이야기를 했고, 족구를 했다. 족구를 자주 했던 건 아니었다. 그래도 가끔씩 "심심한 데 족구나 할까?"란 말이 통하던 때였다.


영화 '족구왕'의 무대는 그렇게 심심할 때라도 하던 족구마저 사라진 시대의 대학이다. 족구장은 테니스장이 돼버렸고, 복학생도 더 이상 족구를 하지 않으며 족구가 면학 분위기를 망치고 그래서 결국 대학의 취업률을 떨어뜨리는 주범이 된 곳. 이곳에 어느 날 제대한 지 5일밖에 안된 복학생 만섭이 나타난다. 아직 습관적인 관등성명을 버리지 못한 이 남자는 군대에서도 원 없이 했던 족구를, 복학하면 더 많이 할 수 있을 거란 꿈에 부풀어있다. 하지만 족구를 하고 싶다는 그의 외침은 다른 이들에게 그저 "족꾸하는 소리"로만 들릴 뿐이다.

'족구왕'을 먼저 본 이들은 이 영화의 유머와 감동을 '아다치 미츠루'와 '소림축구'의 정서로 설명했다. 가히 만섭은 여름에 더 뜨거워질 수밖에 없는 족구소년이고, 만섭의 족구실력은 종종 '소림축구'의 과장된 스타일로 묘사된다. 하지만 그러한 스타일과 만섭이란 주인공을 통해 이 영화가 재현하고자 하는, 혹은 이 영화가 꿈꾸고 있는 건 과거 가수 박남정이 출연했던 '새앙쥐 상륙작전'이나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 같은 1980년대 후반의 캠퍼스 청춘영화인 듯 보인다. 그때의 캠퍼스에는 '족구왕'에 등장하는 총장이나 이사장이 없었다. 대신 학생의 치기를 웃어 넘겨주거나, 배짱으로 봐주는 교수가 있었다. 그때의 캠퍼스에는 취업문제 때문에 이별을 하는 커플이나 공무원 시험준비나 하라는 선배가 없었다. 대신 삼각관계로 고민하고, 유학이나 군입대로 애인을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을 견디거나, 고백을 하지 못해 마음을 졸이는 남녀가 있었다. 그리고 족구를 했다. 무엇보다 족구를 하는 복학생이 있었다.

대략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의 학번을 가진 남자들은 대부분 복학생 형들을 통해 처음 족구를 접했다. 족구도 잘하고, 축구도 잘하고, 술도 잘 마시는 데다 술도 잘 사주고, 연애도 잘하는 것 같고, 수업에는 잘 들어가지 않는 것 같은데 그래도 아는 건 많은 것 같았던 바로 그 복학생형들 말이다. 영화 속의 만섭은 딱 그 시절의 신입생이 바라보던 복학생 형이 2014년의 대학에 떨어진 것 같은 캐릭터다. 토익시험은 본 적도 없고, 학점은 선동열의 방어율과 비슷하지만 그래도 족구 하나만큼은 잘하던 형. '족구왕'은 과거의 복학생을 소환시켜 족구 하나만 잘해도 멋있을 수 있는 시절의 대학생활을 추억한다. 시험기간에도 술을 마시자고 졸랐고, 툭하면 군대이야기를 했고, 밥 사준다고 해놓고 막걸리를 사주고는 "이것도 쌀로 만든 거잖아"라는 식의 허세도 부렸던 그들이 있어서 대학생활이 즐거웠다고 말이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같이 놀기 힘든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영화 속의 대학처럼 '족구'가 사라진 지금은 곧 '복학생'이 무너진 시대다. 이제 그런 복학생은 사라졌다. 과거의 복학생들은 'IMF'를 '미션임파서블'의 비밀조직 이름으로만 알고 있던 시절에 대학에 들어왔다. 풍족하게 살지 않아도 아직은 부모가 자식의 등록금을 견딜 수 있던 때였다. 그래서 그들은 아버지가 IMF때 회사를 나오며 받았던 주식을 팔아 대학에 들어온 98학번의 나에게 술을 사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복학생이나 신입생이나 학자금 대출로 대학생활을 연명하는 처지고, 졸업 후에도 갚을 수 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시대다. 경제가 무너졌고, 복학생도 무너졌고, 족구가 무너졌다. 결국 대학의 낭만도 무너졌다. 이러한 시대에 떨어진 과거의 복학생 만섭은 그래서 '서부극'의 사나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평화가 사라진 마을에 평화를 되찾아주듯, 그는 친구들이 잊고 살았던 낭만을 회복시킨 후 홀연히 사라진다.


영화 속에서 만섭이 낭만을 회복시키는 무기는 오로지 '재미'다. "족구가 너에게 뭐냐?"는 질문에 만섭은 그냥 "재밌잖아요"라고 말한다. 이는 또한 '족구왕'의 영화적 태도이고, '잉여세대'란 말을 내걸었던 최근의 몇몇 청춘영화들과 구별되는 점이기도 하다. 그 영화들의 청춘은 스스로를 잉여로 규정하며 자조했지만, 만섭은 자신이 잉여라고 생각하지 않는 복학생이다. 그 또한 취업이 깜깜하고, 학자금 대출이자를 갚으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처지이지만 그는 자조하는 대신 뛰어난 낙천성으로 세상을 돌파한다. 좋아하는 여자에게는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밀어붙이고, 여자를 웃게하고, 끝내 감동적인 고백을 성사시키는 데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도 끝까지 보듬는다.


현실과 동떨어진 캐릭터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래서 만섭은 더더욱 현실을 상기시키는 복학생일 것이다. '재미' 하나만으로는 무엇도 돌파할 수 없는 지금의 대학생들에게는 슬픈 판타지일 테니 말이다. 돌이켜보면 24,5살 밖에 안된 어린 그때의 복학생들이 대학을 아름답게 만들었던 게 아닐까? 역시 복학생이 바로 서야 대학이 바로 설 수 있는 걸까? 그런데 과연 만섭이 같은 복학생이 다시 부활하는 날이 올까? 그날이 오면 만섭이 형은 다시 족구를 부활시킬 수 있을까? 즐겁지만, 그래서 슬프다.

*2014년 10월, 허프포스트코리아에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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