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에서 그가 말하는 영화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걸어도 걸어도’(2008),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 ‘바닷마을 다이어리’ (2015)등을 연출한 일본의 영화감독이다. 거의 매년 자신의 신작과 함께 한국을 찾는 그는 올해도 신작 ‘세번째 살인’의 개봉을 앞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난 1988년 작인 ‘원더풀 라이프’도 오는 2018년 1월 재개봉될 예정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대한 이야기를 엮은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이란 책도 출간됐다. (‘걸어도 걸어도’와 ‘태풍이 지나가고’의 이야기를 직접 소설로 쓴 책도 출간되어 있다.)
그의 팬이라면, 지난 2015년에 출간된 에세이 집 ‘걷는 듯 천천히’를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을 보면, 그의 영화에서 눈길이 머물렀던 부분들이 대부분 그의 기억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걸어도 걸어도’에 나온 옥수수 튀김은 그가 어린시절 즐겨 먹던 것이었고,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의 소품이었던 ‘가루칸 떡’은 그가 “24살 때 가고시마에서 만난 여자친구가 선물로 주었는데, 별 맛은 없었지만 20대 동안에는 그 떡을 먹을 때마다 그녀를 떠올렸다”는 등의 이야기 등이 담겨 있는 책이었다. 어렸을 때 살았던 집, 어렸을 때 먹은 수제 딸기 우유, 집앞에 심었던 코스모스 등등에 대한 기억부터 3.11 대지진, 영화제에 대한 감상, 방송과 영화의 차이, 다큐멘터리의 본질, 자신의 영화적 태도까지... 책을 보면 그는 살아오는 내내 쌓아놓은 기억도 많고, 상념도 많고, 그 만큼 사연도 많은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의 영화에서 그 기억들을 생생한 감각으로 묘사하는 감독이다.
‘영화자서전’이란 단서가 붙은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또한 그의 경험과 기억에 관한 것이다. 단, 이 책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한 명의 일본인이거나, 한 명의 아들 혹은 아버지가 아니다. 그는 다큐멘터리 연출가로 시작해 텔레비전의 가능성과 한계를 실험했고, 이어 영화를 통해 자신만의 작가적 세계를 구축한 영화감독으로서 기억을 풀어낸다. 다큐멘터리 연출가였던 그는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했고, 자신이 궁금한 사연에 카메라를 들고 갔다. 그렇게 현실에서 만난 사람과 사연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떠올렸고, 그것을 다시 영화로 구성해왔다. ’복지’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는 동안 목격한 남편을 잃은 여성의 모습은 ‘환상의 빛’(1995)으로 이어졌고, 옴 진리교 사건에서 가해자의 유족에 대한 이야기인 ‘디스턴스’(2001)를 떠올렸다. ‘하나’(2006)와 같은 사극 또한 9.11테러 이후의 세계에 대한 그의 고찰이 담긴 작품이었다. “영화는 결코 ‘나’의 내부에서 태어나는 게 아니라 ‘나와’ 세계’의 접점에서 태어난다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아무도 모른다’(2004)와 같은 작품은 특히 이 문장과 맞닿아 있다.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자신을 아티스트가 아닌 직업인으로 묘사한다. 영화를 본 관객은 그의 연출에서 다양한 예술적 감흥을 느끼겠지만, 영화현장의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자신만의 연출방식을 구축했다. 책에는 ‘아무도 모른다’부터 형성된 아역배우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비롯해 각본과 장소헌팅, 캐스팅 과정에서 벌어졌던 이야기 등, 직업인으로서의 회고가 담겨있다. 무엇보다 자본과 명성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영화감독의 입장이 드러난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에게 국제영화제는 자신의 작품을 높게 평가해준 영광스러운 자리가 아니라, 내 영화를 해외에 알리고, 배급하고, 그래서 돈을 벌고, 또 다음 영화를 찍게 해주는 기회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여러 국제 영화제의 특징들을 열거하며 전 세계 영화제가 어떤 권력구도에 놓여있는지 부터, “북미에서는 토론토 국제영화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등의 이야기도 숨기지 않는다. 마지막 장에서는 영화감독이라면 영화제작비과 흥행성의 균형을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말한다.
책을 보면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세계적인 영화감독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천재적인 재능이 아니라, ‘꾸준한 활동’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세상에 대한 꾸준한 관찰과 참여를 통해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많은 기억과 사연들을 켜켜이 쌓아온 사람이다. 덕분에 그의 영화에는 다른 나라의 관객들도 함께 공명할 수 있는 감각이 살아있다. 그러니 그가 자신의 영화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건 자연스럽다. “만약 제 영화에 공통된 메시지가 있다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은 비일상이 아니라 사소한 일상 속에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그의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만한 문장이다.
*2017년 12월, 허프포스트코리아에서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