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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병진 Aug 04. 2018

영화 속의 '롤렉스' 시계들

롤렉스의 쓰임새는 깊고 넓다.

영화에서 시계는 주인공의 성격을 완성시키는 소품이다. 유독 롤렉스는 완성시킨 영화 속의 인물들이 많은 편이다. 거친 액션배우의 손목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롤렉스의 쓰임새는 그보다 더 깊고 넓다.  


<킬빌 Vol.2> - 그녀의 운명을 바꾸는 90초

암살단 ‘데들리 바이퍼’의 단원인 베아트릭스(우마 서먼)는 조직의 수장인 빌(데이빗 캐러딘)과 사랑에 빠졌다. 그의 아이를 가진 것 같은 생각이 든 순간. 그녀는 임신 테스터기를 구입한다. 그리고 자신의 롤렉스 데이토나로 정확히 90초를 맞추고 기다린다. 베아트릭스에게 이 90초는 그냥 흘러가는 90초가 아니다. 잔혹한 암살자가 엄마로 변신하는 순간이고, 빌을 떠나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만드는 시간이며 결국 그녀에게 닥치는 비극을 초래하게 만든 순간이다. 롤렉스의 마니아들은 영화에 등장한 시계가 가짜 롤렉스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는 감독인 쿠엔틴 타란티노가 의도한 설정이다. 홍콩과 일본 등 아시아의 액션영화에 빠졌던 자신의 취향을 마음껏 드러낸 이 작품에서 그는 홍콩액션영화에 종종 가짜 롤렉스가 등장했다는 기억 때문에 패러디했다고 밝혔다.

 

<무간도2 - 혼돈의 시대> - 사내의 로망  

쿠엔틴 타란티노가 홍콩 영화에서 ‘가짜 롤렉스’를 자주 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신의 몸 하나 믿고 사는 남자들에게 롤렉스 시계가 갖는 상징 때문이었을 것이다. 밑바닥 생활에서 탈출한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자, 비록 ‘가짜’라고 해도 롤렉스가 뿜는 허세의 기운을 만끽하고 싶은 욕망. 1편으로부터 시간을 돌려 1997년 홍콩반환이전의 시대로 돌아간 <무간도2 - 혼돈의 시대>  또한 그 바닥 남자들의 마음을 ‘롤렉스’로 보여준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보이는 장면은 젊은 유건명(진관희)이 거리를 걷는 모습이다. 그는 우연히 만난 시계 매장의 쇼윈도에서 수많은 롤렉스 시계를 본다. 그 중에서 그가 관심을 갖는 시계는 롤렉스 에어킹이다. 몇년 후, 경찰이 된 유건명은 월급을 받은 돈으로 샀을 롤렉스 에어킹을 갖고 있다. 롤렉스를 찬 폼나는 건달이 되고자 했으나, 롤렉스를 가진 번듯한 경찰이 된 상황. 물론 롤렉스는 건달에게나 경찰에게나 어울리는 시계다.  


<007 죽느냐 사느냐> - 제임스 본드의 손목은 누구의 것인가

지난 2011년, 8번째 007시리즈인 <죽느냐 사느냐>에서 로저 무어가 착용한 롤렉스 서브마리너는 당시 크리스티 경매에서 약 2억 7000만원에 낙찰됐다. 영화 속 본드가 시계 테두리의 톱날을 이용해 밧줄을 끊기도 했던 전설적인 소품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임스 본드와 롤렉스가 매우 유서 깊은 관계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낙찰 금액일 것이다. 007의 원작자인 이안 플레밍은 자신이 롤렉스를 즐겨 착용한 터라, 소설 속 제임스 본드에게도 롤렉스를 채웠고, 이는 영화로도 이어졌다. <나를 사랑한 스파이>부터는 잠시 일본의 세이코 시계를 착용했지만, 다시 롤렉스로 돌아온 제임스 본드는 <골든 아이> 이후로 ‘오메가’를 착용하는 중이다. <카지노 로얄>에서는 누군가 ‘그 시계가 롤렉스?’냐고 묻자, “오메가”라고 말하는 장면도 나온다. 하지만 여전히 이 시리즈의 원년 팬들은 여전히 제임스 본드의 손목에 차있는 롤렉스를 기억할 게 분명하다.  


<겟 카터> - 그의 손은 누구에게도 따뜻하지 않아  

<다크 나이트> 시리즈에서 알프레드 집사를 연기한 마이클 케인은 젊은 시절, 냉정과 열정사이를 오가던 배우였다. 대표작 중 하나는 <겟 카터>에서 연기한 잭 카터 같은 남자도 그가 완성시킨 인물이었다. 형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알고 난 후, 복수에 나선 그는 수많은 여자의 유혹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인 동시에 복수에 얽힌 사람이라면 친구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죽이는 냉혹한 사람이다. 당시 마이클 케인이 잭 카터를 그리면서 입었던 다크 블루의 트렌치 코트와 장총은 이후 그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스타일로 기억됐다. 무엇보다 그의 손목에 있던 클래식 롤렉스 데이저스트의 금색과 갈색 스트랩이 이 영화의 스타일을 하나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귀여운 여인> - 그래도 내 여자에게만은 따뜻하겠지

<귀여운 여인>의 주인공 에드워드 루이스는 기업 인수 합병의 달인이다. 상류층의 일원으로서 최고급 펜트하우스를 가진 그는 어느 날 우연히 콜걸 비비안을 만나고 자신의 사업을 위한 파트너로서 두 사람은 함께 지내게 된다. 하지만 비비안이 콜걸이라는 사실을 안 에드워드의 동료가 그녀를 희롱하다 못해 뺨을 때리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날 밤 에드워드는 직접 얼음으로 비비안의 얼굴을 식혀준다. 이때 드러나는 에드워드의 손목에는 롤렉스 데이저스트가 차 있다. 어쩌면 에드워드의 지위에서 볼 때는 다소 소박한 시계일 듯. 하지만 그래서 에드워드의 마음 속에 백만장자 사업가와는 또 다른 면이 있다는 걸, 암시하는 소품이기도 하다.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과거를 이야기하고, 사업 파트너 이상의 감정을 나누기 시작된다. 대부분의 영화가 주인공의 남성미를 강조하기 위해 롤렉스를 이용했다면, <귀여운 여인>은 그의 로맨티시즘을 부각시키는 요소로 사용한 듯 보인다.  


<모두가 대통령의 남자들> - 진실이 드러나까지 남은 시간

신문기자는 시계가 필수적인 직업 중 하나다. 취재원과의 약속을 지키기위해, 혹은 마감시간을 확인하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남들보다 빠른 특종을 위해서도 시계가 필요하다. 사실상 기자는 시간과 싸운 직업인 셈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배후를 파헤친 ‘워싱턴포스트’의 두 기자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의 실화를 그린 <모두가 대통령의 남자들> 속 로버트 레드포드는 오른손 손목에 항상 롤렉스 서브마리나를 차고 있었다. 왼손이 전화를 받는 손이라면, 그의 오른손은 통화내용을 기록하는 손이다. 메모를 하던 그는 직감적으로 시계를 확인한 후, 다시 다른 취재원을 만나기 위해 책상을 떠나곤 한다. 전 세계 언론 역사상 가장 집요했던 취재의 순간을 그리는 이 영화에서 로버트 레드포트의 롤렉스는 그가 가진 냉철한 이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소품이었다.  


<신세계> - 너와 나의 우정을 확인하는 시계

영화 <신세계>에는 진짜 ‘롤렉스’ 시계가 나오지 않는다. 자성(이정재)에게 ’명품(처럼 보이는 가짜)시계’를 선물한 정청(황정민)은 되려 “이런 것 좀 사오지 말라”는 소리를 듣고는 “나중에는 진짜로 사다줄게”라고 말한다. 이후 정청이 자성을 위해 다시 사온 시계는 ‘롤스’(ROLES)’다. 이것도 가짜 시계지만, <신세계>에서 이 반복은 유머가 아니다. 정청은 (이번에는 가짜인 티가 그나마 덜나는) 이 시계를 통해 자성에게 그동안 못한 말을 던진다. 나는 너의 비밀을 알고 있다. 하지만 묻고 갈테니 너는 그냥 내 동생으로 살아라. 그 마음을 받아들인 자성은 시계를 손목에 차고, 정청의 후계자이자, 조직의 1인자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영화 속에 이 시계들은 그렇게 ‘잔정’의 선물에서 의리를 확인하고픈 마지막 제안을 거쳐 변신의 계기로 의미를 달리한다. 거친 남자들의 손목에 어울리지 않게 그려진 귀여운 판다 그림은 신의 한수와 같은 설정이었다.  


<언노운> - 다재다능한 롤렉스

영화에서 주인공의 롤렉스는 종종 여러 가지로 변신한다. 그것은 총이 되기도 하고, 자동차로 변신하기도 하며 배고픈 배를 채울 음식이나 하룻밤 누울 수 있는 침대가 되기도 한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홀로 버려진 주인공에게도 로렉스 하나가 있다면 당장 필요한 것과 교환할 수 있다, 그만큼 롤렉스 시계는 오래된 것이든, 새것이든 상당한 화폐적 가치를 지닌다. 영화 <언노운>에서 하루아침에 자신의 이름과 직업, 그리고 아름다운 아내까지 빼앗겨버린 마틴 해리스(리암 니슨)에게도 롤렉스 딥씨(Rolex Deepsea) 하나가 있었다. 그는 유일하게 자신을 믿는 지나(다이앤 크루거)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시계를 건넨다. 그리고 친절하게 이 시계의 가치를 말해준다. “5,000유로(한화 650만원) 정도 나가는 거예요. 손에 껴봐요. 이건 진품이에요.” 롤렉스가 제임스 본드의 손목에 있어야만 다재다능한 기능을 갖는 건 아니다.


*매거진 B N.41 '롤렉스'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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