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병진 Aug 04. 2018

영화 속의 '색'은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영화를 보다가 유독 당신의 눈에 띄는 색이 있다면, 그건 당신의 눈에 띄기 위해 그 자리에 있는 색이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이상, 우연히 그 자리에 있게 된 색은 없다. 영화에서 색은 당신의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현기증>(알프레드 히치콕)의 ‘빨강’ - 그는 누구인가?  

알프레드 히치콕이 남긴 대부분의 작품은 흑백영화였다. 하지만 그는 흑백영화에서나 컬러영화에서나 ‘색’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전하려 애쓴 감독이다. 흑백영화인 <싸이코>에서는 마리온이 입은 브래지어의 색깔 변화를 통해 그녀의 심리가 어떻게 이동하는지를 전달했고, 컬러영화인 <현기증>에서는 매들린의 의상과 그녀를 둘러싼 소품들을 통해 ‘빨강색’이 관객들의 눈에 띄게 만들었다. 매들린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의 공간 속 벽지는 온통 빨강색이다. 스코티가 자살하려는 매들린을 구했을 때도 그녀는 빨강색 예복을 입고 있다. 그녀는 매우 위험한 사람이다. 그녀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 영화 속 빨강은 관객을 향한 소리 없는 비명이었다.  


<그녀>(스파이크 존즈)의 ‘복숭아빛 핑크’ - 그는 지금 어떤 상태인가?

  

대필 작가인 테오도르의 일은 곧 다른 이들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 그는 사랑을 상상할 뿐, 사랑이 없는 외로운 남자다. 스파이크 존즈가 테오도르의 외로움을 드러내기 위해 선택한 색은 ‘짙은 복숭아빛의 핑크’였다. 사랑스러운 느낌의 색이지만, 오히려 과장된 느낌의 색이다. 테오도르는 이 색깔의 셔츠만 입고 살다가, 같은 색깔을 가진 인공지능 운영체제를 만난다. 사랑을 갈구하면서 상상의 나래를 펴온 그가 자신과 공감하는 이를 만났으니, 설사 그 상대가 인공지능이라고 해도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그녀’를 만난 이후, 테오도르의 외로움이 채워지면서 그의 옷 색깔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더 로드>(존 힐코트)의 ‘무채색’ - 그는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가?   

영화는 장르에 따른 익숙한 색감을 갖고 있다. 공포영화들이 대부분 푸른빛을 띠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 기호는 주인공이 사는 시대를 드러내는 데에도 쓰인다. <더 로드>가 그리는 세계는 지구가 멸망한 이후다. 사람들은 사라졌고, 거리의 풀마저 시든 공간에 도드라지는 색깔이 있을 리 없다. <더 로드>뿐만 아니라, <터미네이터 : 미래 전쟁의 시작>이나 <일라이>처럼 인류멸망 이후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들은 모두 무채색의 공간을 담고 있다. 사실적인 연출은 아니지만, 관객은 오히려 그런 연출이 더 사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이 색감은 곧 영화와 관객이 오랫동안 맺어온 일종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마더>(봉준호)의 ‘보라색’ - 그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엄마는 그냥 여자였다. “생리대를 써본 지가 너무 오래된” 여자이고, 오로지 아들만 바라보는 엄마이지만 봉준호 감독은 곳곳에서 이 엄마가 그래도 여자라는 느낌을 드러낸다. “너 여자랑 자봤어?” “응, 엄마랑” 빨강색 옷을 입고 있던 엄마는 아들이 살인용의자로 몰리자, 낡은 보랏빛 자켓을 입고 자력구제에 나선다. 이 엄마에게 이 옷은 일종의 전투복인 것이다. 하지만 뜻밖의 진실을 알게 되고, 그 진실을 감추려 하면서 엄마의 보라색은 비밀의 색이 된다. 세상의 색 사이에서 그녀를 감추어줄 수 있는 색. 이 옷을 입은 엄마는 더 이상 여자가 아니다. 엄마는 더 지독한 엄마가 되어간다.  


<트랜스포머>(마이클 베이)의 ‘오렌지색과 파란색’ -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 두 가지 색만 본다 

‘오렌지색과 파란색’은 현대 블록버스터 영화를 지배하는 색이다. 관객들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도시에서 벌어진 폭발의 화염이 대비되는 순간, 이 색의 조화를 볼 수 있다. 과거의 블록버스터는 실내공간이나, 혹은 밤 장면에서만 CG의 공력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제는 태양 아래에서도 CG의 화력을 불어넣을 수 있게 되었다. <트랜스포머>의 로봇 전투 장면이 대표적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색감의 탄생은 기술의 과시이자, 시각적인 충격을 전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금은 대부분의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이러한 색감으로 클라이맥스를 구성한다. 그 영화가 그 영화 같고, 이미 본 영화를 또 본 것 같은 착각이 든다면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오렌지색과 파란색 때문일 것이다.  


*'매거진 B' N.46 '팬톤'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