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비

가을에 내리는 여름비

by 이룸





약속이 있는 날, 창밖에는 세찬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연은 아이를 등원시키고 곧장 버스에 올랐다. 가을인데도 장마처럼 퍼붓는 비를 바라보자 마음이 괜히 심란해졌다.


‘이게 정말 가을비가 맞나… 언니가 아니라면, 비 오는 날엔 절대 약속을 잡지 않았을 텐데. 그래도 다행이네. 큰 골프 우산을 챙겨와서 비에 거의 젖지 않았으니.’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걷다 보니, 어느새 언니와 만나기로 한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이선은 이연 근처에 사는 친언니였다.

어릴 적부터 둘은 다른 자매들과 비교해도 각별히 가까웠다. 이선은 이연과 달리 유난히 따스한 사람이었다. 창가에 비치는 햇살처럼 곁에 있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


식사를 하고 카페에 자리를 잡자,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리고 결국, 서로밖에 나눌 수 없는 이야기에 닿았다.


아빠에 관한 이야기였다.


“내가 이 얘기 안 했지? 아빠한테 연락이 왔어.”


엄마와 아빠가 이혼한 뒤, 많은 일이 있었다. 실망과 미움, 그리고 깊은 상처 속에서 이연은 아빠와 완전히 연락을 끊었다. 반면 장녀였던 이선은 갈등이 많았지만, 아주 가끔은 아빠와 연락을 이어갔다.


“뭐라고 하셨어? 그걸 왜 이제 얘기해?”

“그냥… 네가 마음 아플까 봐.”


이선은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문자 내용은 별것 아니었다. 이사를 간다는 이야기, 작은 부탁,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


마지막 메시지엔 이런 구절이 담겨 있었다.


‘어려운 때 자식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해 하늘을 보기가 부끄럽다는 것. 다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욕심을 버린 지금은 마음이 부자라는 것. 그래서 계좌를 알려줄 필요는 없다는 것. 그럼에도 고맙고, 많이 고맙다는 말이었다.’


이연은 언니의 마음이 상할 걸 알았기에 눈물을 참았다.


어릴 적, 아빠는 이연이 가장 따랐던 사람이었다. 먹기 싫던 음식도 아빠가 먹으면 따라 먹을 만큼.

하지만 그 아빠는 시간이 흐르며 이연의 마음을 가장 괴롭히는 존재가 되었다.

절연하며 느끼는 죄책감, 왜 이렇게밖에 될 수 없었는지에 대한 분노와 슬픔. 10년 넘는 세월 동안 아빠의 소식은 닫혀 있었다. 결혼도, 아이도 알리지 않은 채로.


그런데 이제, ‘고맙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을 마주한 이연의 마음은 복잡했다. 반갑기도, 서글프기도 했다.


그 순간, 기도 끝에 응답을 받은 듯한 마음이 들었다. 아빠를 미워해야 할 이유가 사라진 것 같았다. “우리 아빠가 정말 별로야”라고 말하는 건 곧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는 일이고, 그건 견딜 수 없는 비참함이었다.


‘아빠가 별로니까 나도 별로일까?’ 하는 무거운 마음에서 벗어나듯, 오히려 상쾌했다.


그래, 우리 아빠도 결국은 평범한 드라마 속 아빠들처럼 자식에게 미안함을 품은 사람이구나.


“언니, 문자 캡처해서 보내줘.”

왜냐고 묻는 이선에게 이연은 ‘그냥’이라고 답한 뒤, 대화를 다른 주제로 돌렸다.


“언니, 이제 가자. 나 애기 하원할 시간이야.”


이연은 그렇게 언니와 헤어지고 버스 정류장에 서서 비를 바라보았다.

가을에 쏟아지는 여름비처럼 시원하게 내리는 빗줄기를 보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이 쓰디쓰니, 비가 와서 다행이었다.

다 씻겨 내려가면 곧 무지개가 뜰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