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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미애 May 04. 2018

왕가위 필모그래피①

<열혈남아>부터 <타락천사>까지

왕가위(王家卫)

흔히 그를 두고 불안정한 현실과 불투명한 미래를 말한다고 하고, 지독한 허무주의에 빠져있다고도 한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스스로를 낙관주의자라 소개하고 허무주의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예전에는 사람들의 평가나 스스로의 성향 설명 둘 중 하나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작품들을 곱씹어 볼수록 두 가지 모두 맞는 말처럼 느껴진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이별하고, 남겨진 이들은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을 토해낸다. 그리고 남는 것은 허무함. 하지만 억지스럽게 끼워 맞춘 해피엔딩에 대한 강요보다 항상 담담하게 풀어놓는 그의 결말이 더 영화스러우면서도 현실에 가깝다. 왕가위를 기다리고 열광하게 되는 이유. 

본 글은 왕가위 필모그래피에 있는 10개 작품에 대한 정보가 될 수도, 감상이 될 수도 있는 짧은 코멘트 위주의 아주 주관적 관점의 글임을 미리 알린다. 



열혈남아(旺角卡門, As Tears Go By, 1987)


데뷔작. 사실 깜짝 놀랄만한 데뷔같은 충격이나 왕가위스럽다는 느낌은 덜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매특허인 스텝프린팅의 시작과 공중전화 키스씬 때문이라도 꼭 봐 둬야 할 작품. 


낮에 활동하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리, 영화 속 주인공들은 밤의 시간들을 살아간다. 햇살이 쏟아지는 낮은 무기력하게 잠만 자거나 초라하게 어묵을 팔며 지내야 하는 시간이면서 결국엔 아화(장만옥)와 소화(유덕화)가 이별하고, 소화와 창파(장학우)가 죽음을 맞이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그들의 시간인 밤도 화려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어두운 밤거리 그리고 좁은 길 혹은 막다른 골목은 '하루하루 살아갈 뿐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소화와 단 '일분이라도 영웅이 되고 싶다'는 창파의 앞을 계속 막아선다. 


+ 대만판과 홍콩판의 결말이 다르다. 소화(유덕화)의 죽음으로 끝나는 버전과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기억을 잃는 버전 두 가지가 있다.




아비정전(阿飛正傳, Days Of Being Wild, 1990)


왕가위 영화의 매력은 특유의 서정적인 대사와 내레이션 그리고 특히 음악에 있다는 평에는 동의하지만, 이미지로 기억되는 영화라는 것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데뷔작이었던 <열혈남아>의 경우 공중전화씬으로 대표되는 인상적인 이미지도 제법있긴하지만 스토리로 기억되는데 반해, 두 번째 작품인 <아비정전>부터는 강렬한 이미지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다.


주인공 아비(장국영)를 중심으로 등장인물 모두가 자신만의 사랑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서정적이고 느린 템포로 풀어놓는 사랑 이야기인 <아비정전>은 진짜 왕가위 스타일의 출발이라 평가받는다. 1편 마지막에 등장하는 양조위를 주인공으로 한 2편이 제작되려 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 


비록 1편의 흥행 실패로 저주받은 걸작이자 성사되지 못한 프로젝트로 남은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지점이지만 머리를 빗어넘기는 장면 하나면 양조위 팬들에게도 충분하다고 위로해본다. 이후 작품들인 <동사서독>, <화양연화>, <2046> 등에서 <아비정전>의 감수성은 그대로 이어진다.  




동사서독(東邪西毒, Ashes Of Time, 1994)

동사서독 리덕스(東邪西毒 Redux, Ashes Of Time Redux, 2008)


최인훈 작가는 소설 <광장>을 증쇄할 때마다 퇴고를 거쳤다고 한다. 이미 모두에게 인정받은 작품을 고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스스로 작품의 완전함을 부인하는 작업, 작가에게 기존 작품의 퇴고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작업이다. 이유야 어찌 됐건 왕가위도 15년이 지나 <동사서독>을 다시 꺼내들어 복원하고 재편집해 <동사서독 리덕스>를 내놓았다. 이것 역시 엄청난 용기가 아닐까? 오리지널 <동사서독>이든 故 장국영에게 바친다는 <동사서독 리덕스>든 좋은 것은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저마다 집착하고, 지우려 하고, 잊으려 하는 엇갈린 사연들이 등장하고 조각난 파편같은 내러티브는 서독(장국영)에 의해 차곡차곡 쌓여간다. 타인의 이야기를 덤덤히 모으던 서독은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다. 영화는 <동사서독>이라는 제목 그대로 동사(양가휘)의 이야기로 시작해 서독으로 마무리되는 이야기 구조를 취한다. 마지막에 이르러 밝혀지는 서독을 찾는 동사와 동사를 기다리는 서독의 사연과 이유는 영화의 백미 중 백미. 


무협에서도 왕가위의 감수성은 계속된다. <아비정전>이 그랬던 것처럼 무협이라는 장르는 껍데기일 뿐, 왕가위는 <동사서독>에서도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중경삼림(重慶森林, Chungking Express, 1994)


두 명의 경찰 223(금성무)과 633(양조위)을 중심으로 (어김없이) 사랑의 끝과 새로운 시작에 대해 말하고 있다.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가게 주인의 대화 같은 방백과 반복되는 각각의 인물들의 독백 같은 내레이션, 스쳐가는 사람들처럼 엇나간 시선들과 관음증을 통해 파편처럼 흩어져있는 이야기를 묶어내는 것은 관객들의 몫이다. 


개인적으로 <중경삼림>에서 흥미로운 점 두 가지. 우선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과 그것을 소비하는 공간인 편의점. 어떤 일이든 (특히 사랑은) 크게 열정을 쏟은 후 실패하고나면 다시 시작할 수 없을 것만 같지만 대체재는 항상 존재한다. 헤어진 애인의 전화를 끊임없이 기다리는 223과 아비(왕페이)를 기다리는 633의 태도는 어떻게 봐야 할까? 현실 속 사랑의 세태에 대한 반발일까 그렇지 않다면 지난 사랑의 대체품을 맞이하는 과정일까? 


두 번째는 복장. 노랑머리(임청하)는 위장용 가발을 벗어던지고, 날짜와 시간에 집착하던 223은 삐삐를 버린다. 전 애인은 633에게 제복이 잘 어울린다고 말하지만 그는 제복을 벗어버리고, 아비는 승무원이 되어 제복을 입고 나타난다. 자신을 규정하던 것들을 벗어나고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꽤나 흥미롭다. 




타락천사(墮落天使, Fallen Angels, 1995) 


왕가위의 영화에서 빠지면 섭섭한 내레이션이지만 <타락천사>에서는 유독 더 도드라져 보인다. 굳이 제목에 기대지 않더라도 외롭고 고독한 이들 혹은 말을 할 수 없는 이들의 속마음을 유일하게 엿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다른 부분들 다 걷어내고 내레이션만 놓고 본다면 개인적으로 최고 작품이라 생각한다. 양조위, 장국영의 흔적이 짙은 탓에 왕가위 영화 속 여명의 모습은 참 낯설지만, 그래도 목소리는 영화와 참 잘 어울린다. 


압도적인 네임밸류와 두터운 팬덤을 가지고 있는 왕가위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타락천사>는 그리 주목받는 작품은 아니지만, <중경삼림>과 연속되는 느낌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참 아끼는 작품. <중경삼림>을 좋아한다면 <타락천사>를 꼭 권하고 싶다. <중경삼림>이 쿨한 매력이 있다면, <타락천사>는 찌질하고 끈적한 매력이 있다. 


+ 원래는 <중경삼림>의 하나의 에피소드였으나 이야기 덩어리가 커 독립된 작품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 경찰 223. 전화기를 붙들고 있던 <중경삼림>의 하지무가 수감번호 223의 벙어리로 출연한다. 

+++ '킬러에게도 초등학교 동창은 있다'는 내레이션은 언제 들어도 빵 터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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