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투게더>부터 <일대종사>까지
왕가위(王家卫)
흔히 그를 두고 불안정한 현실과 불투명한 미래를 말한다고 하고, 지독한 허무주의에 빠져있다고도 한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스스로를 낙관주의자라 소개하고 허무주의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예전에는 사람들의 평가나 스스로의 성향 설명 둘 중 하나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작품들을 곱씹어 볼수록 두 가지 모두 맞는 말처럼 느껴진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이별하고, 남겨진 이들은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을 토해낸다. 그리고 남는 것은 허무함. 하지만 억지스럽게 끼워 맞춘 해피엔딩에 대한 강요보다 항상 담담하게 풀어놓는 그의 결말이 더 영화스러우면서도 현실에 가깝다. 왕가위를 기다리고 열광하게 되는 이유.
본 글은 왕가위 필모그래피에 있는 10개 작품에 대한 정보가 될 수도, 감상이 될 수도 있는 짧은 코멘트 위주의 아주 주관적 관점의 글임을 미리 알린다.
해피 투게더(春光乍洩, Happy Together, 1997)
보통은 <화양연화>가 하지만 어느 땐 <중경삼림>이 때때로 <아비정전>이.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왕가위 영화의 선호도지만, 내게 영원한 no.1은 <해피 투게더>다.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가야 했고, 지구를 한 바퀴 돌았음에도 지워지지 않는 사랑. 이렇게 쓰린데도 꾸역꾸역 참으며 그들의 사랑을 다시 꺼내보는 내가 한심하다가도, 엔딩에서 타이틀곡을 들으며 카타르시스가 몰려올 때면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하곤 한다.
<해피 투게더>를 아끼는 가장 큰 이유는 아휘와 보영에게 왕가위의 페르소나로 불리는 양조위와 장국영의 실제 모습이 투영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보영에게선 자유로운 영혼 장국영의 모습이 해야하는 것을 하는 아휘에게선 어느 역할이든 해내는 프로페셔널한 배우 양조위의 모습이 엿보인다.
+ 시나리오도 없이 무작정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떠난 것은 유명한 일화. 심지어는 1달이 지나가도록 크랭크인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 왕가위 골수팬들은 <해피 투게더>보다는 <춘광사설>이라고 부른다. 왕가위 부심을 한번 부려보고 싶었다.
+++ 춘광사설 : (구름 사이로) 갑자기 비추는 봄 햇살
화양연화(花樣年華, In The Mood For Love, 2000)
스타일이 정립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데뷔작인 <열혈남아>를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이유로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를, 저마다의 이유로 필모그래피 내에서 이질적인 작품들로 골라내곤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화양연화>가 주는 느낌이 참 묘하다. <중경삼림>, <해피투게더> 등과 더불어 왕가위의 대표작임은 인정하지만 <화양연화>가 주는 느낌은 다소 이질적이다.
<화양연화>는 가장 왕가위스럽다가도 뜯어보면 이전까지 그리고 이후의 왕가위와는 다른 감성이 도드라지는데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우선 첫 번째, 왕가위는 늘 주로 엇갈린 감정과 이루지 못한 사랑과 슬픈 기억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그동안의 작품들에 비해, <화양연화>의 차우와 리춘은 사랑의 감정을 철저하게 숨긴다. 그리고 두 번째, 기억에 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해 온 왕가위 영화에서는 시간이 주는 의미가 각별했다. 하지만 <화양연화>에서는 밀폐된 공간, 좁은 계단, 혼잡한 상점 등 시간보다는 공간이 더 두드려져 보인다. 마지막으로 다른 작품들보다 <화양연화>는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다는 느낌이 강하고, 장면들이나 이야기가 소설보다는 시에 가까운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2046(2004)
사랑은 타이밍이다. 같은 상황이라도 조금 빠르거나 늦으면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언젠가 과거를 벗게 되면 날 찾아달라는 말은 과거와 현재의 수리 첸(공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화양연화>의 후일담이지만 다른 템포를 지닌 <2046>. 자기복제와 매너리즘의 이유로 박하게 평가하는 이들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동의하기는 힘들다. <화양연화>의 차우, <아비정전>의 루루, <중경삼림>의 페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왕가위 팬 입장에서는 충분히 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이전까지 왕가위 영화의 집대성이자 총정리, 종합선물세트 같은 느낌의 작품이 바로 <2046>이다.
한 가지 주목하고 싶은 점은 시선이 굉장히 독특하게 느껴진다는 점. 카메라 구도가 정석적이지 않다. 인물들이 가운데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좌우 한쪽으로 치우쳐있는데 뒤통수 쪽 공간이 더 열려있다거나 서로 직접 마주 보지 않고 반사된 형상에서만 마주 보고 있다던가 하는 식이다. 감각적인 느낌은 좋지만, 혹시 이를 통해 과거와 미래에 대한 암시, 엇갈린 운명을 드러내고자 했다면 약간 낯간지럽긴 하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My Blueberry Nights, 2007)
왕가위 필모그래피 중에 가장 낮은 평가를 받는 대표적인 작품. 개인적으로도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가 다른 작품들보다 뛰어나다 혹은 완성도와 별개로 좋다는 느낌은 없지만, 그래도 다시 볼 때마다 조금씩 평가가 나아지는 작품이다. 완성도를 떠나 <이터널 선샤인>,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펀치 드렁크 러브>, <러브 미 이프 유 데어> 등과 더불어 매니아가 많은 작품 중 하나. 포스터에 사용된 키스씬 만으로도 기억할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슬픈 사랑과 방황하는 주인공들 모습 그리고 내레이션까지. 홍콩을 떠나 뉴욕으로 갔지만, 왕가위는 여전하다. 물론 왕가위의 전매특허도 좋고, 그동안 남성 위주의 이야기에서 엘리자베스라는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는 등의 변화가 반갑지만, 더 참신한 무언가를 꺼내지 못한 점은 못내 아쉽다. 장소 이동과 캐릭터의 인종이 바뀐 것을 제외하면 캐릭터, 장면 등 대부분의 것들이 기존 왕가위 영화 속 어디선가 본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의 가장 큰 패착이다.
+ <중경삼림>과 이어지는 구석이 있다. 633이 오픈 예정이던 패스트푸드 점이 뉴욕식 카페로 재구성되었다.
++ 뉴욕에서도 여전한 담배. TV에서 왕가위 영화를 보기 싫은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맛깔나는 담배 연기를 볼 수 없기 때문.
일대종사(一代宗師, The Grandmaster, 2013)
데뷔 후 가장 긴 공백 끝에 내놓은 <일대종사>. 의외의 선택이라는 평이 대부분이었다. 이미 대중적으로 익숙한 엽문이라는 캐릭터, 거기에 액션과는 어울리지 않는 양조위를 캐스팅, 그리고 그의 영화에선 낯선 1900년대라는 과거의 시간까지. 하지만 영화를 보고 있자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엽위신, 견자단과는 다른 방향, 그러니까 영춘권의 일대종사인 엽문이라는 캐릭터를 빌려왔지만, 액션이 아닌 인생과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고, 비록 액션은 부족할지 모르나 삶의 깊이를 표현하기엔 양조위만한 배우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낯선 시간에서 시작했던 영화는 왕가위의 시간인 1960년대로 돌아와 마무리된다.
수평과 수직. 최후에 서있는 자가 승리하는 것이라는 엽문의 말은 쿵푸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닐 것. 언젠가 남겼던 짧은 코멘트처럼, 왕가위 더욱 깊어진 느낌이다. 왕가위의 엽문에 대해 막연한 기대감과 어마어마한 믿음이 있었다. 이미 <동사서독>을 통해 왕가위가 찍으면 무협도 다르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
+ 양조위가 액션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너무 강조한 것 같은데, 액션신의 빈도를 떠나 충분히 잘 해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