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지의 개들>, <펄프 픽션>, <재키 브라운>
왕성하게 활동 중인 감독의 작품세계를 시기별로 구분하는 것은 조심스럽고, 어쩌면 무의미한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나눠보자면, 현재까지 타란티노 영화는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같은 시기의 작품은 내러티브 구현 방법이나 소재와 배경 등에서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1기는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부터 <펄프 픽션>, <재키 브라운>에 이르는 90년대 작품들로 LA 지역을 중심으로 한 갱스터물이다. 이 시기 작품들은 전통적인 영화의 내러티브 구현 방법인 서사구조를 비트는 형태를 취한다. 2기는 <킬 빌> 시리즈와 <데쓰 프루프>로 전반기와 후반기의 2분할이 가능한 내러티브와 B급의 전통을 잇고 있는 작품들이다. 3기는 최근작인 <바스터즈 : 거친녀석들>, <장고 : 분노의 추격자>, <헤이트풀8>로 역사적 배경을 영화로 차용해와 구체적인 시간을 제시하는 일종의 대체 역사물 장르다.
작가론에 대해서는 기회가 된다면 다시 이야기하는 것으로 하고. 간 보는 것처럼 무책임하게 던져 놓은 서두지만,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서론이 좀 필요했다는 핑계를 대본다.
저수지의 개들(Reservoir Dogs, 1992)
단 한편으로 헤모글로빈의 시인이라는 별명을 안겨준 타란티노의 걸출한 데뷔작. 30살도 되지 않은 감독이 이렇게나 능글맞고, 처녀작부터 노련할 수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보석상을 터는 강도들의 이야기이지만, 정작 다이아몬드를 탈취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고, 플래시백 등 몇몇 장면을 제외하면 창고라는 오직 한 공간에서만 그리고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서만 진행되는 독특한 형식의 영화.
챕터 형식으로 인물들이 차례로 등장하고 이를 통해 사건의 퍼즐 조각이 하나씩 맞춰진다. 매 순간 달라지는 상황과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설정이 참 재밌다. 많은 작품을 여러번 보면서 알게 된 것은 타란티노는 상당히 불친절한 듯하면서도, 알고 보면 또 꽤 여러 곳에 정보들을 잘 드러내 두는 편이라는 점. 본명과 인적사항을 말하지마라고 했던 조(로렌스 티에니)의 지시를 기억한다면, 일당 중 유일하게 누구에게도 본인의 이름과 출신을 밝히지 않았던 미스터 핑크(스티브 부세미)가 살아남는 결과는 그리 놀랍지 않은 결과일수도 있다. (물론 앵글 밖 대사를 통해 미스터 핑크도 도주까지는 성공하지 못했음을 알게 되지만)
마돈나의 'Like a virgin'과 웨이트리스에게 줄 팁을 두고 벌이는 논쟁이 인상적인 첫 번째 시퀀스는 <바스터즈 : 거친녀석들>의 챕터 1과 함께 가장 아끼는 타란티노 영화의 오프닝이다. 본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면과 이야기를 붙여놓은 것 같지만, 사실 오프닝만 열심히 봐도 <저수지의 개들>은 반 이상 본 것이나 다름없다.
+ 원제 'reservoir dogs'에서 reservoir는 저수지 외에도 창고라는 뜻도 있다. 일종의 오역.
++ 빠듯한 예산임에도 현실성 확보를 위해 의료 전문가를 대동해 미스터 오렌지가 흘리는 피의 양을 조절했다고 한다. 하여간 이상한 아저씨라니까.
펄프 픽션(Pulp Fiction, 1994)
설명이 무의미한 영화. 그리고 유독 설명에 자신 없는 영화. 철없던 시절 이 영화를 3번째 보고 나서 겉멋 잔뜩 든 표정으로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따라 하며 '<펄프 픽션>을 세 번 본 사람과는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허세를 부렸던 기억이 있다.
개인적으로 엄청난 충격과 의미를 가진 인생의 영화 중 한 편이고, 가장 많이 본 작품 중 한 편이기도 하다. 오직 이 시기 그리고 타란티노만 할 수 있었던 괴작(현재의 타란티노에게 <펄프 픽션> 같은 작품을 내놓으라고 해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확신한다)이자 앞으로 영화사의 한 페이지에 남을 명작. 조금만 과장해서 수식어를 붙이자면 영화라는 매체에서 활용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장치과 대중문화에서 다룰 수 있는 거의 모든 소재가 다 담겨있다.
빈센트와 부치라는 두 명의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이 약 36시간 동안 겪은 사건 정도로 요약 가능한 이야기는 시간의 재배치를 통해 전혀 다른 이야기로 탄생했다. <펄프 픽션>은 전통적인 이야기 방법인 시간의 흐름이나 서사 중심의 문법을 거부하며 기승전결도 의미가 없어졌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뒤섞인 이야기가 그 자체로 충분히 매력적인 기승전결을 만들어 냈다는 점.
+ <저수지의 개들>의 미스터 블론드의 본명은 빅 베가, <펄프 픽션>의 빈센트의 풀네임은 빈센트 베가. 둘은 형제 사이다.
++ 빈센트 캐스팅의 경우 제작사에서 다니엘 데이 루이스를 밀었으나, 타란티노가 존 트라볼타를 고집했다고 한다.
재키 브라운(Jackie Brown, 1997)
타란티노의 필모그라피에서 가장 이질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재키 브라운>. 그의 작품 중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아닌 유일한 작품으로 엘모어 레너드의 소설 <럼 펀치>가 원작이다. <장고 : 분노의 추격자>의 경우 리메이크 or 오마쥬 정도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장고>라는 영화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맥거핀이라고 본다.
<재키 브라운>이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것은 이전 작품들의 흐름들과도 다르고, 바로 뒤에 이어지는 <킬 빌> 등과도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이다. 혹자는 타란티노가 성장했다고 평가하기도 하고, 본인의 스타일을 뽐내지 않아도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타란티노 영화 중에 가장 저평가(물론 그의 작품들이 전체적으로 상당한 고평가를 받고 있는 이유도 있다)를 받는 작품이자 팬들에게도 소외된 작품이다.
표면적으로는 시간 순으로 진행되는 평범한 이야기 구조지만, 델 아모 쇼핑센터 시퀀스에서는 타란티노의 스타일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저수지의 개들>에서 보여줬던 각각의 인물들의 상황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며 퍼즐이 풀려가는 것이나 <펄프 픽션>에서 주인공인듯 주인공아닌 주인공같았던 빈센트처럼 타이틀 롤인 재키 브라운 대신 보석감정사 맥스가 실질적 주인공 역할을 하는 것이 그것이다.
+ 이미 언급한대로 <재키 브라운>은 작가 엘모어 레너드의 소설 <럼 펀치>를 원작으로 했고, 주인공 팜 그리어에 대한 오마쥬로 제작된 필름이다. 그래서 팸 그리어가 주인공으로 출연했던 1974년 작품인 <Foxy Brown>의 제목 폰트까지 차용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