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 빌>, <킬 빌2>, <데쓰 프루프>
왕성하게 활동 중인 감독의 작품세계를 시기별로 구분하는 것은 조심스럽고, 어쩌면 무의미한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나눠보자면, 현재까지 타란티노 영화는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같은 시기의 작품은 내러티브 구현 방법이나 소재와 배경 등에서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1기는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부터 <펄프 픽션>, <재키 브라운>에 이르는 90년대 작품들로 LA 지역을 중심으로 한 갱스터물이다. 이 시기 작품들은 전통적인 영화의 내러티브 구현 방법인 서사구조를 비트는 형태를 취한다. 2기는 <킬 빌> 시리즈와 <데쓰 프루프>로 전반기와 후반기의 2분할이 가능한 내러티브와 B급의 전통을 잇고 있는 작품들이다. 3기는 최근작인 <바스터즈 : 거친녀석들>, <장고 : 분노의 추격자>, <헤이트풀8>로 역사적 배경을 영화로 차용해와 구체적인 시간을 제시하는 일종의 대체 역사물 장르다.
작가론에 대해서는 기회가 된다면 다시 이야기하는 것으로 하고. 간 보는 것처럼 무책임하게 던져 놓은 서두지만,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서론이 좀 필요했다는 핑계를 대본다.
킬 빌(Kill Bill: Vol. 1, 2003)
킬 빌2(Kill Bill: Vol. 2, 2004)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사실이지만, <킬 빌> 시리즈는 원래 한 편으로 기획된 작품이었다. 하지만 러닝타임 등의 문제로 제작사에서 두 편으로 나누기로 결정. vol.1과 vol.2로 각각 나눠 개봉했다. 유심히 지켜볼 것은 책의 권수를 나타내는 vol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점. 챕터 5에서 끝난 vol.1에 이어 vol.2가 챕터 6부터 시작되는 것을 생각한다면 비록 둘로 쪼개 개봉했지만, 한 편의 영화의 1부와 2부 또는 전반부와 후반부라 생각해도 무방할 듯하다.
1부는 사무라이, 야쿠자, 애니메이션 등 일본 문화를 배경으로 시각적 자극과 액션에 방점을 두고 있다. 2부는 홍콩 무협, 쿵푸, 웨스턴에 대한 그의 취향이 반영되어 있고, 굳이 나누자면 정중동에 더 가까운 성격을 지니고 있다. 1부와 2부는 작품의 방법론, 흐름, 리듬 등 여러모로 대조적인 성격을 지닌다. 타란티노가 가끔씩 전혀 예상치 못한 장면을 천역덕스럽게 이어 붙여 놓는 것처럼 반대방향에 있는 <킬 빌>의 1부와 2부도 그렇게 붙여놓았다. 비록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킬 빌> 1부와 2부가 한편으로 상영된다? 혼란스러워할 관객과 분탕질로 즐거워할 타란티노의 얼굴이 떠오른다.
+ "복수는 직진이 아니다. 복수는 숲이다. 방향을 잃기 쉽다." 개인적으로 매우 아끼는 대사인데, 자막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오기도 하는 것은 함정.
데쓰 프루프(Death Proof, 2007)
북미지역에서는 절친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의 좀비물 <플래닛 테러>와 함께 <그라인드 하우스>라는 제목으로 함께 개봉했다. <데쓰 프루프>는 <그라인드 하우스> 내 2부작 중 1편을 담당하고 있고, 그 자체로도 2분할이 가능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데쓰 프루프>만 놓고 보자면 병원 시퀀스를 기점으로 영화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구분이 가능한데, 결론은 다르지만 전후반부 모두 여자들의 수다와 자동차 추격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킬 빌> 1부가 브라이드를 이용한 1인칭 액션게임이었다면 (덧붙이면 2부는 RPG같은 느낌) <데쓰 프루프>는 레이싱게임 같다. 이는 타란티노 2기의 큰 특징으로, 현실과 동떨어진 타란티노가 완벽하게 새롭게 창조해낸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등장인물은 경험하는 것 외에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고, 이는 관객들도 마찬가지다.
마지막 20분에 달하는 자동차 추격씬은 이 영화의 백미. 앞서 흘러 지나간 100분 가까운 시간이 마지막 이 추격적을 위한 에피타이저로 여겨질 정도. 비록 도심에서 벌어지는 추격씬보다 스펙터클한 맛은 떨어질지 몰라도 아무것도 없는 한적한 시골길에서 차량 단 두 대만으로 20분간의 추격전을 끌고 나갈 수 있다는 점 자체로 존중받을만 하다.
+ (등장인물에 관한 내용은 후에 다른 포스팅에서 다시 다룰 생각인데) 킬 빌에서 등장했던 보안관 부자가 병원 시퀀스에서 다시 등장한다. 특히 두 작품 모두에서 아버지 보안관은 상황에 대해 의심하고 냉철하게 분석하지만, 해결하려는 의지나 능력이 없다. 어마어마한 함정.
-관련 글-
타란티노 영화 속 그 장면 https://brunch.co.kr/@fulfpiction/21
쿠엔틴 타란티노 필모그래피① https://brunch.co.kr/@fulfpiction/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