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풀칠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풀칠 Jul 02. 2023

나의 전세보증보험


이거 혹시 전세 사긴가. 퇴근을 한 시간 남겨두고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이번에 이사 들어간 집은 번듯한 신축 투룸 빌라다. 드디어 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집을 구했다고 좋아했는데 입주 첫날 저녁부터 그만 욕실에 불이 나가버렸다. 오밤중에 집주인에게 고쳐달라고 하기도 뭣해서 문자를 남긴 게 하루가 다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다. 오전에 전화도 몇 통이나 남겼었는데 저녁까지 아무 연락이 없는 건 확실히 좀 이상하다. 사무실 계단으로 가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두 번 즈음 가더니 끊긴다. 호흡이 가빠 온다. ‘전세사기’란 단어를 검색해 본다. ‘집주인이 연락 두절일 경우 전세사기가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함.’


지하철에서 정말로 전세 사기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 봤다. 전세금은 2억, 그중 대출이 1억 9천이었다. 계속 서울에서 버티고 살 수 있을까? 보증보험도 안 들었는데. 아빠는 무슨 배짱으로 요즘처럼 흉흉한 세상에 보험도 안 드냐고 핀잔을 줬었다. 난들 보험을 들기 싫어서 안 들었겠나. 공인중개사는 이 집이 이 주변에서 제일 안전한 집이라고 했다. 서울 전체로 넓혀봐도 이런 조건은 흔치 않다고, 등기부등본도 깨끗하고 융자도 없고 다 괜찮다고 했다. 무슨 말인지 정확히 이해는 못 했지만 보증보험이 된다고 해서 믿고 계약을 한 건데, 보험 심사에서 떨어졌다. 땅값에 비해 전셋값이 너무 높단다. 된다고 했다가 안된다고 하는 일이야 세상에 워낙 흔하니 그러려니 하고 말았는데, 막상 전세금 2억을 홀랑 날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다. 한 번 더 집주인에게 전화를 건다. 이번에도 연락이 되지 않는다. 이제 마지막 희망은 집주인이 살고 있는 2층에 직접 찾아가 보는 것뿐이다.


-


살면서 남의 집 문을 그렇게 두들겨댈 일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초인종은 한 번 누르고 관뒀다. 내 절박함에 비해 너무 해맑은 소리가 났으므로. 쾅쾅쾅. 제발 안에 있어라. 쾅쾅쾅. 제발 누구라도 나와라. 영원 같은 몇 초가 지나고 집주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난닝구 바람의 할아버지가 그렇게 반갑긴 처음이었다.


왜 전화를 안 받으세요. 전화를? 무슨 전화. 제가 오늘 열통도 넘게 전화했잖아요. 하나도 안왔는디. 그의 통화목록은 더없이 단정했다. 혹시 저 차단하셨어요. 아 아침에 온 게 거기여? 보이스피싱인줄 알고 그냥 죽여버렸지. 내 번호 위엔 ‘행복하세요~!’라고 적혀있었다. 나도 모르게 가입된 부가서비스가 있었나 보다. 저는 할아버지가 전세 사기꾼인 줄 알았다구요. 나는 그쪽이 ‘행복하세요~!’하길래 보이스피싱범인줄 알았네. 우리는 서로를 재산을 털어먹으려 작정한 사기꾼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집주인의 핸드폰을 받아서 차단을 해제하고, 내 번호를 저장했다. 내가 핸드폰을 능숙하게 다루는 걸 보는 집주인의 눈에 불이 번뜩 켜진다. 자네 혹시 핸드폰 잘 아나. 그럼 나 이것 좀 도와줘. 집주인은 직업 교육 기관에서 보낸 문자메시지를 내게 들이민다. 경비원 안전교육을 내일까지 들어야 한다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다. 아마 무슨 노인 일자리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것 같았다. 회원가입을 하고 강의를 찾은 다음 재생시키는 일이 그에겐 너무 버거운 일이었던 것이다. “미안해요. 나도 꽉 막힌 사람은 아니라고. 나이가 들어서 바보가 됐지만.” 그를 꽉 막힌 사람이라고 생각할만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변명을 먼저 건네는 품에서 여러 번 모멸감을 겪어본 티가 난다. 집주인에게 몇 번이고 로그인 방법과 강의를 듣는 방법을 알려줬다. 내친김에 노트북으로 강의를 듣는 법까지 설명해 준다. “할아버지 이게 크롬이라는 건데요, 요즘엔 이걸로 인터넷 쓰셔야 해요.”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던데, 건물주를 가르치는 처지가 되고 나니 기분이 묘하다. 보증보험도 못 들 만큼 비싼 전세방을 놓는, 일흔이 넘은 집주인이 직업교육을 받으면서 ‘취준’을 하고 있었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고. 우연히 어떤 장막 너머를 보게 된 기분이었다. 고도성장기에 평생을 일해 건물을 한 채 마련한 사람도, 멈출 수 없게 만드는 나름의 위태로움을 갖고 있다. 이 위태로움은 회사를 다니며 대출을 받아 조금씩 살만한 방으로 옮기다니는 30대 직장인의 그것과 같은 토양에서 자라났다. 세대를 건너뛰며 개량은 조금 되었을지 모르지만 품종 자체는 같은 놈이다. 방에 돌아와 집주인이 고맙다며 건넨 참외를 씹었다. 그제야 화장실 불이 나간 얘길 안 했단 걸 깨달았다.


-


그 일이 있고 나서, 나는 집주인의 집에 자주 들락거리게 되었다. 어느 날은 노트북이 고장 나서 가고(마우스 건전지가 나갔다.) 어느 날은 로그인이 안 돼서 가고(Caps Lock이 켜져 있었다.) 어느 날은 새로운 강의를 신청해야 해서 갔다.(국비지원 강의의 종류는 정말로 다양하다.) 집주인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일은 마치 하루 끝에서 만나는 보너스 게임 같았다. 쉽게 해결할 수 있고, 보상이 즉각적으로 주어진다. 어느 날엔 물티슈, 어느 날엔 김치, 어느 날엔 만두.


집주인의 집에 내려갈 때마다 그는 매번 어떤 화나는 일이 있었는지를 들려준다. 이 핸드폰은 눈탱이를 맞아서 약정을 3년이다. 저기 몇 호에선 변기에 사과를 넣어서 고치는 데 20만 원이 깨졌다. 몇 호는 나갔는데 가구가 어찌나 많은지 바닥이 다 쓸려서 장판을 새로 해야 한다. 요즘 사람들은 돈을 조금만 벌면 다 써버린다. 나는 그 투덜대는 소리를 듣는 게 싫지 않았다. 이 노인의 투덜거림을 듣다 보면 그의 신분이 건물주이긴 하지만 나랑 같은 품종의 위태로움을 기르고 있단 게 다시금 확실해지기도 하고, 조금 속물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이런 사람은 절대로 2억 원이나 되는 거금을 들고 잠적할 위인이 되지 못할 거란 확신도 드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에 잠겨 간단한 컴퓨터 문제들을 해결하다 보면 화장실에 불이 나갔단 얘기는 늘 까먹게 된다.


지난 주말엔 집주인이 건물 옥상으로 나를 불렀다. 옥상엔 컴퓨터도 없는데 무슨 일인가 싶어 얼른 올라가 봤다. 옥상엔 어디서 주워왔는지 흰색 철제 책상이 하나 놓여있었다. “그래도 책상은 있어야지” 이사 나가는 집 가구가 많다고 투덜대던 날 우리 집엔 가구가 아무것도 없다고, 아무것도 안 들이고 살다 나갈 테니 걱정 말라고 너스레를 떨었던 게 이번 호출의 원인인듯싶었다. 우리는 같이 책상을 들고 내 방으로 갔다. 책상은 방의 빈 곳에 맞춘 듯이 딱 맞았다. “몇 년은 쓰겠구먼." 다리가 덜렁거리고 상판이 갈라진 책상은 몇 년까진 버티지 못할 게 분명해 보였지만, 어쨌거나 공짜로 살림이 늘어났단 건 좋은 일이다. 집주인도 기분이 좋았는지 생색내는 말을 한다. 집주인도 기분이 좋아 보인다. “계속 갖고 다니면서 오래오래 쓰라고.” “네. 잘 쓸게요.” “그래. 오래오래 쓰면서 나를 기억하라고. 자네는 나를 배반하지 말라고."


기억과 배반. 그 말은 너무 거창해서 생뚱맞기까지 하지만 나는 굳이 이상하게 들으려고 하는 대신 또 한 번 속물적인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집주인이 잊혀지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배반당할 걸 걱정하는 심약한 사람이라면 나는 괜찮다, 내 전세금은 괜찮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이 낡은 책상이 내겐 전세보증보험이다.


이렇게 보증금을 날릴 뻔한 문제는 해결됐다. 이제 남은 문제는 화장실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풀칠 143호 <나의 전세보증 보험>

매거진의 이전글 전문성을 갖고 싶으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