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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개의 달 Jan 07. 2019

아침 열한시의 서점

문화문고


서점이 문 닫는대.

 B가 밥상에 앉아 제일 먼저 꺼낸 말에 심장이 덜컥 놀랐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B네 학교 앞을 34년 동안 지킨 사회과학서점이 경영난에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었다. 1억의 부채를 진 서점 앞을 지나며 B의 선배는 ‘그래도 좀 버텨줬으면 좋겠는데...’하고 중얼거렸다 한다. 서점이 당장 누군가에게는 생계가 달린 공간이라는 것을, 생각만으로는 지킬 수 없고 버틸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그렇게 말했겠지.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지만, 이미 버틸 대로 버틴 서점이라 하니 책등이 누렇게 변하고 시대가 지나 더는 누구도 찾지 않는 책이 가득 있을 것이다. 그 책 모두를 끝내 안고 가고 또 가다가 결국 종착에 도달했을 테지. 버텨온 서점을 가보지 않고도 훤히 아는 것은. 문 닫는 서점 이야기에 심장이 놀란 것은. 내 가슴 속에도 그렇게 버텨온 서점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산 아래에 폭 싸여있는 동네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목에 아주 굵은 글씨의 간판을 가진. 동네 책방 문화문고가 있다. 내 나이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은 채 이 동네를 지켜온 서점. 내 지성의 성전이자 평생 잃고 싶지 않은 최후의 궁전. 작지만 글자로 된 세계의 전부를 만날 수 있는 그 서점에는 월화수목금토일 하루도 쉬지 않고 오전 열한시 쯤 나와 셔터를 올리고 오후 열한시 쯤 셔터를 내리는 사장님이 산다. 사장님에게 문화문고는 집이다. 하루의 전부를 이 서점에서 책을 주문하고, 받고, 정리하고, 파는 것으로 보낸다. 제법 묵직한, 하지만 크지는 않은 서점은 사장님의 원칙하에 돌아간다. 어떤 책을 어디에 둘지, 어떤 책을 더 데려와야 할지. 이 공간의 모든 규칙은 나름대로 견고하게 돌아가며 서가를 지킨다. 구석 조금 어두운 자리에는 꾸준히 새로운 시인들의 이름이 등장하고, 이중으로 두꺼운 서가 너머의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은 가끔씩 이가 빠진다. 마지막으로 들춰본 때를 기억조차 할 수 없는 두꺼운 국어사전과 고등학생의 상징과 같았던 수학의 정석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영영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낡은 고전들 너머에 이 달의 베스트셀러가 꽂혀있고, 바둑 기보를 들춰보는 어르신 옆에 아이돌 얼굴이 큼지막하게 실린 잡지가 놓여있는 그런 서점. 책을 살 때는 집 전화번호 뒷자리를 부르고, 이 자리에 없는 책은 무엇이든 구해 달라 부탁할 수 있는. 모두의 단골 같은 서점. 그런 서점이 문화문고다.
 문화문고의 카운터에는 사장님의 손글씨로 쓰인 수많은 출판사 번호가 든 수첩이 있고, 각 학교 방학 숙제를 위한 추천도서 목록이 붙어있다. 그리고 카운터 바닥은 작고 단단한 사장님의 무게만큼 반들반들 닳아있다. 이 자리에 맞춰서 서면 된다고 가르쳐주는 무용실의 발자국 스티커처럼. 누군가의 선택을 받아 이 카운터를 지나간 수없이 많은 책들 위에는 작은 물고기 같은 문화문고의 서인이 찍혀있다. 이 동네에는 아마 그 물고기가 찍힌 책이 집집마다 적어도 한권은 있을 것이다. 우리 집처럼 수족관을 차릴만한 집도 분명 있을 것이고. 서점 뒤편 쪽방에는 급한 끼니를 해결하는 작은 부엌과 오는 이 누구에게든 내어주는 믹스커피가 있다. 서점과 사장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카운터 옆 작고 파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믹스커피를 마시며 한가득 이야기를 나누다 간다. 오래전 총판에서 함께한 동료, 옆 동네 서점주인, 자주 책을 사가는 선생님, 요리책 콜렉터 우리 엄마까지. 가끔은 나도 파란 의자를 차지하고 앉아 글 쓰는 것, 책을 읽고 사는 것. 문화문고가 내게 필요한 이유 등을 늘어놓는다. 이야기가 술술 나오는 의자라 한번 앉으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내내 라디오처럼 떠들기도 한다.


 누구보다 알고 싶은 것이 많고, 글자가 좋았던 나를 여기까지 키워 놓은 공간은 분명 문화문고일 것이다. 한글 교재를 처음 받고, 동화책을 한참 펴놓고 고르고. 추천도서 목록은 영 내게 안 맞는다며 툴툴대며 사가고, 아는 척 하기 위해 세계문학을 고르고. 입시 문제지를 잔뜩 사고, 자격증 기출문제를 찾고. 친구에게 위로가 될 시집을 선물하고, 아이들을 가르칠 문제지를 사고. 자취요리책을 고르기까지. 그 모든 시간에 문화문고가 있었다. 자신 있게 안다고 말할 것이 무엇도 남지 않았던 순간에도, 그 자리에 서점이 하나 있어 나를 지켰다. 글자로 된 것은 꾸준히 읽고 다듬어 끝내 알 수 있다고. 그러고도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은 내려두어도 된다고. 끝없이 나를 세우는 진리와 위로들을 글자 너머를 통해 받았고, 그 모든 시작은 이 동네의 단 하나뿐인 서점 문화문고였다.  
 언젠가 끝내 이 동네에서 문화문고가 사라진다면. 나의 생 한 켠을 들어낸 것 같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머리가 아찔해질 때 마다 서점 문을 열고 들어가 인사를 하고 책을 산다. 서점은 사람 마음에 문장을 심는다. 어떤 문장이 누구에게 꽃을 피울지는 알 수 없지만, 나처럼 아주 늦되는 녀석도 간혹 있어 생의 수많은 날들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B와의 대화에서 그랬듯이. 생각만으로는 지킬 수 없다고 되뇌며 어떻게 해야 더 오래 그 자리에서 계속 책을 만나고 사장님을 만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아직 혼자서는 마땅한 답을 찾지 못했기에 오늘도 그저 내일 해 뜨면 가서 사올 책 이름을 부지런히 적는다. 문화문고는 내일도 열 테니까. 아침 열한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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