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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개의 달 Dec 13. 2018

오른쪽상현 왼쪽은하현

근래의 어느 날 밤이 생각난다.

 멀리서 놀러온 친구 R이 옆에서 자고 있었고, 밤은 그렇게 까맣게 물들고 있었다. 새벽에 물을 마시러 눈을 떴는데, 방이 너무 밝아서 동이 틀 때 쯤 깼다고 생각하며 시계를 봤다. 여전히 새벽 세시 반. 밤의 커튼콜이 만나기엔 너무 이른 시간. 가로등 빛이 쏟아진다 생각했지만, 서울의 가로등은 흔히 아는 주황색이다. 그럼 뭐지?      


눈을 부비며 창문을 열었는데 달이 켜져 있었다.      


 아주 크고 하얗고 환한 달. 책에서 읽은 달빛으로 쓴 잉크가 선명하게 보일 것만 같은 달. R을 불러서 같이 보자 할까 했지만 곤히 잠든 모습에 쉬이 깨울 수가 없었다. 창문에 매달려서 내 눈이 보이는 곳 까지 한참을 그렇게 보고 있었다. 정말 가깝고 커서 왜 사람이 달에 갈 생각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저렇게나 가까이 정말 혼신을 다해 지붕에서 도약하면 닿을 것만 같은데 얼마나 궁금했을까. 매일 밤 떠서 모양을 바꿔가며 빛나는 저 것이 무엇인지, 대체 어떻게 저렇게 환하게 켜지는지. 모두들 궁금했을 테지.

 거미줄 같은 골목길에 따닥따닥 집들이 붙어있는 동네. 그 위로 입혀지는 달빛. 이런 날에는 정말 마법이라도 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영화나 소설에서도 다들 그런 날을 묘사하는 것을 보면 진짜 이런 날 밤에만 일어나는 일들이 있고 어쩌면 오늘이 내게 그 날인 것은 아닐까. 아쉽게도 나는 마법사나 마녀, 마법소녀가 될 재능은 없는 모양이다. 생애 이런 순간들을 몇 번이고 마주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을 보니. 날아다니거나 없던 물건을 만들어내는 마법은 도무지 재능이 없겠지만, 늦은 밤 옆에서 잠든 이에게 마음을 보내는 정도의 마법은 나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R의 머리를 쓱 쓰다듬어주고 이불을 새로 덮어주었다. 그간 꾸어온 모든 악몽이 사라질 수 없다면, 적어도 이 순간만은 가장 달고 행복한 꿈을 꾸길 바라면서. 그리고 오랜 불면증을 앓고 있는 이들의 이름을 떠올렸다. 이 밤 뜬눈으로 지새울 이들에게 저 큰 달이 아주 작은 위로가 되기를. 그리고 끝내 언젠가는 모든 것들을 내려두고 푹 잠들기를 마법으로 열심히 걸어보았다. 이얍.

 달을 처음 보았던 최초의 기억이 언제인지는 도무지 찾아낼 수 없지만, 오늘 최초의 달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다. 고개를 들어 그저 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빛인지. 어디 있는지. 매 순간의 달은 눈과 마주친 순간 최초의 달이 된다. 늘 똑같은 날들이 없는 것처럼 매 순간이 최초가 된다. 하늘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날에는 구름 저편에서 달이 좀 쉬고 있을 것이라 믿어본다. 매일 모두에게 얼굴을 보이고 있으니 좀 피곤한 날들도 있겠지. 그런 날에는 쉬어야지.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좋은 휴식이 필요한 것처럼. 

 삭부터 초승, 상현을 거쳐 보름달에 도달한 달은 다시 천천히 하현, 그믐을 지나 사라진다. 달은 그 모든 날들에 뜬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날들에도, 해가 뜬 낮에도. 내가 잔뜩 차지 않은 순간에도, 순서를 잊어서 마냥 길을 잃은 날들에도. 초승과 그믐은 쉽게 헷갈리지 않는데, 상현과 하현은 그렇게 자주 잊어버렸다. 가득 찬 날과 비어있는 날의 어드메를 헤매는 것이 썩 유쾌하지 않아서일까. 한참을 외워도 잘 해내지 못하니 날 위해 주문을 만들어줬다. 달은 오른쪽부터 차고, 사라질 때도 오른쪽부터 사라진다. 오른쪽상현 왼쪽은하현. 오른쪽만 있는 반달은 상현달, 왼쪽만 있는 반달은 하현달. 이렇게 모든 일들이 주문으로 똑 떨어지면, 편하지만 영 재미는 없겠지. 어떤 주문들은 머릿속 한 구석에 폭 박혀서 툭 건드리기만 해도 기억을 불러낸다. 앞으로 당신이 달을 보시면 이 주문이 성큼성큼 따라 나왔으면 좋겠다.      


오른쪽상현 왼쪽은하현.     


 대보름이나 명절이면 꼭 식구들이 모두 나가 달을 보고 소원을 비는데, 어느 해에는 소원을 빌다가 달의 중력이 지구보다 가벼운 이유를 깨닫고 혼자 피식 웃었던 적도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소원이 달로 날아가서 꽂힐 텐데, 매번 그것들을 가득 달고 있을 달은 얼마나 무겁겠는가. 그래서 달은 중력을 가볍게 만들어서 월식이 오는 날 남몰래 푸스스 소원들을 우주 어딘가에 보내는 것이다. 돌다 돌다 언젠가 이루어지는 것들도 있고, 지금도 우주 어딘가를 유영하는 것도 있겠지. 내가 어릴 때 빌었던 첫사랑과의 영원은 아마 유영하다 블랙홀에 들어간 모양이지만, 앞으로도 계속 좋아하기만 하는 것들을 만나게 해달라는 소원은 우주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내게 계속 신호를 보내는 모양이다. 그러니 이렇게 끝내 글을 쓰게 되지 않았을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달 사진 찍기에 성공해본 적이 없다. 비싸고 좋은 카메라가 아니어서 그랬던 것도 있겠지만. 인터넷에 나온 온갖 방법을 다 도전해도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예쁜 달을 보면 또 안 될 것을 알면서도 시도하고, 실패 끝에 늘 생각한다. 너무 아름다워서 박제가 안 되는 것이라고. 너무 아름다우니까 사진 한 장에 넣을 수 없는 것이라고. 옥상을 내려오면서 전화를 건다.     


어 난데,

그냥 오늘 달이 예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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