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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May 09. 2019

위장된 사랑에 속아 넘어간 불쌍한 여자 역할

진공 상태 3부



나에게는 아직 더 많은 시간과 밤과 커피가 필요하지만, 며칠이 지난 지금 한 가지에 대해서만은 확신이 들어. 그건 ‘진실’에 대한 부분이야. 나는 알 권리가 있었고 너는 그 권리를 인정해주지 않았다는 것. 그게 내가 첫 번째로 깨달은 사실이야. 


우리가 서로에게 진실하지 않았던 순간에 대해 털어놓는다고 해도, 내가 밝혀야 할 진실은 고작 한 가지뿐이야. 비냄새가 선선하게 배어나던 어느 밤, 지난 연인의 예고 없는 방문이 있었어. 갑자기 무슨 영문인지 집 앞에 불쑥 나타나 내 심장을 곤두박질치게 만든 거야. (미심쩍어 보이는 사람이 손목을 턱 하고 낚아채기에, 버클이 달린 클러치백으로 머리를 찍어버렸지 뭐야.) 


물론 진실을 털어놓지 않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으니 정상참작해주길 바라. 그 시각 너는 곧 함께 일을 시작하게 될 예비 동료들과 맥주 한 잔으로 친분을 다지고 있었고, 나는 네가 미래를 준비하는 그 타이밍에 굳이 너에게 충격을 줄 필요가 있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러지 않는 편을 택했을 뿐이야. 그를 다시 받아주지 못하는 미안함 때문에 동정하듯 건네는 이별의 키스 따윈 물론 없었으며, 내가 그에게 준 유일한 따스함은 뒷모습에 건넨 안쓰러운 눈빛이 전부였다는 점을 거듭 얘기하고 싶네. 


열 손가락이 모자라는 나의 과거사 때문인지 너는 그 부분을 꽤나 미심쩍어했지만, 난 그에 대해서는 한치의 거짓도 없다고 확언할 수 있어. 나 스스로도 매우 놀랄 정도지만 이 얘긴 넘어가는 게 좋겠어. 지금 우리가 나눠야 하는 이야기는 나의 과거사 따위가 아니거든. 내가 왜 '알 권리'까지 들먹이며 진실을 요구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 적어볼게. 물론 네가 바람을 피웠다거나 나 모르게 도박을 했을 거라고 추측하는 건 아니야. 그저 감정에 대한 변론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거야. 


어느 여름, 우리가 찾아간 '라 플라야(La playa)'에 대해서 먼저 얘기해보자. 내가 지나가듯 말한 '블랙 빠에야'를 너는 기억하고 있었고, 놀랍게도 그 요리를 맛볼 수 있는 음식점을 찾아내고야 말았어. 똑같은 구글링인데 왜 내가 찾을 땐 나오지 않던 정보들이 네가 찾으면 탁탁 건져지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음식점에 도착하기도 전에 나는 이미 감동에 젖어 있었어. 이토록 세심하고 다정한 남자라니. 우리는 접시에 쌓여가는 홍합 껍데기를 바라보며 깔깔 웃었고 나는, 내가 앞으로 살아가며 '블랙 빠에야'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일이 있다면 오늘의 일을 언급하지 않고는 도저히 넘어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머릿속에 그 날의 아름다움을 꾹꾹 눌러 담았지.


남쪽 바다를 여행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어. 그 날 아침, 내가 마주한 건 비릿한 바다 냄새와 눈이 시린 햇살, 목 끝까지 올라온 이불과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오래도록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너였어. 내가 네 배 위로 엉거주춤 기어올라가자 너는 내 머리를 꼭 끌어안으면서, 나에게 맛있는 것도 먹이고 바다의 가장 예쁜 풍경도 보여줘야 하는데 숙소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동선이 부드러울까, 고민하고 있다고 했어. '몇 가지 후보가 있어, 들어 봐' 하며. 이 글을 읽고 있는 여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거야. 충만하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배꼽 언저리에 느껴지는 찌릿함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나는 이런 이야기를 백 열두 가지쯤 늘어놓을 수 있어. 너는 늘 세심했고 로맨틱했으며 나는 늘 감격했고 고마웠지. 하지만 나는 듣고야 말았어. ‘지쳤다, 완벽, 하지만, 사랑' 같은 글자들에 대해서 말이야. 솔직히 말하면, 네가 한 말을 정확하게 다시 읊을 수는 없어. 그날의 모든 순간은, 어째서인지 물안개처럼 흐릿하기만 하거든. 아무래도 너에게서 느껴지는 낯선 분위기에 압도당해 정신이 혼미해진 게 분명해. 


네가 분명하게 하고자 한 말은, 그 완성된 문장은 무엇이었을까. '너에게 지쳤다. 너는 완벽한 여자였다. 하지만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였을까? 아니, 아니야. 너는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뱉지 않았어. 이건 분명해. 그렇다면 '나는 지쳤다. 너에게 완벽한 남자이고 싶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게 너무 어렵게 느껴진다'였을까? 음, 이런 뉘앙스에 가까웠던 것 같긴 한데 뭔가 이질감이 느껴져. 아무튼 중요한 건 네가 '지쳤다'는 거야. 그렇다면 나에게 마약처럼 주었던 그 수많은 배려와 사랑은 어느 순간부터 꾸며진 것이었다는 건가, 내가 의심하고 있는 건 바로 이 부분이야. 내가 위장된 사랑에 완벽하게 속아 넘어간 불쌍한 여자 역할이었다는 사실만은 정말 인정하고 싶지가 않네.




글. 지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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