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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May 13. 2019

확신할 수 없는 이별

진공 상태 5부


병원에 다녀왔어. '속이 메스꺼워서 음식을 잘 못 먹는다'는 내 말에, 배 여기저기를 꾹꾹 눌러보던 의사는 '위염이네요. 현대인의 감기 같은 거니까 스트레스받지 말고 음식은 부드러운 것만 드세요'라고 대답했어. 도대체 스트레스는 어떻게 해야 안 받는 건가요, 하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친절한 의사 선생님께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서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나왔지. 나도 참, 그런 근본적인 질문을 낯선 사람에게 갑자기 들이밀다니 안되지 안돼.


집으로 돌아오는 길, 늘 가던 꽃집에 들러 프리지아 한 단을 샀어. 가장자리가 거무죽죽해진 고개 숙인 프리지아는 앞마당에 있는 그녀들의 무덤에 곱게 묻어주고, 새로운 꽃줄기의 밑단을 일정하게 잘라 화병에 꽂아두었어. '와줘서 고마워' 하고 말을 거니, 프리지아는 몽글거리는 꽃잎을 살랑살랑 흔들며 마주 인사를 했어. 


다행스럽게 약을 한 봉지 챙겨 먹고 나니 마음에 위로가 될 만한 것들이 떠오르기 시작했어. 가장 큰 위안은 ‘이 시점의 나’에 대해 네가 눈곱만큼도 모른다는 사실이야. 이해할 수 없겠지만, 나에게 이보다 더한 우선순위는 없어. 너에게 죄책감을 주었다는 또 다른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니까. 내가 의도하지 않은 일로 네가 부담을 느낀다면, 그보다 마음 쓰린 일도 없을 거거든.


덧붙여 알아낸 건 내가 스스로 '이상한 여자'처럼 굴고 있다는 거야. 메타와 이별할 준비를 하고 있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메타와 이별을 했기 때문인 걸까.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어.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슬픔인지조차도 분명하지 않으니 말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지금 완벽한 진공 상태야.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사로잡혀 현실을 거부하는 중인지도, 감정을 인지할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 것일지도 몰라. 


진진은 오늘 나에게 '이런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네가 부정하고 싶은 것을 부정할 수 없다는 가장 큰 증거'라고 말했어. 이 말에 대해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 이건 솔직히 내가 그동안 진진에게 들은 말 중에 가장 철학적인 말이야. 그녀의 입에서 이런 문장을 듣게 될 줄이야. 물론 나는 이 말의 진위여부에 대해 거듭해서 생각해 볼 예정이야. 웃어 넘기기에는 찝찌름한 뒷 맛이 남는 말이잖아.



 

글. 지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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