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와이너의 '행복의 지도'와 함께
이 글은 '몰라도 아는 척 102화'방송을 기반으로 합니다.
저는 유독 다음과 같은 시간대에 행복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하곤 합니다.
아침에 부스스한 눈으로 비척비척 출근길에 오를 때
한바탕 기운을 다 쏟아낸 뒤 정리할 일들을 생각하며 퇴근하는 길
보통 행복의 순간에는 그 잠깐의 쾌감에 몸을 맡기느라 행복에 대해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곱씹으며 '나는 행복한가?'라고 반문하는, 사실 그리 행복하지도 그리 불행하지도 않은 어중간한 상태가 행복을 탐구하기엔 가장 좋은 순간이지요. 그렇게 하루를 곱씹어 보면 사람을 불행하게 할 요소는 차고 넘치는 반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은 몇 가지 내로 추정하기 쉽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불행을 따로 측정하는 실험은 없지만 유엔 산하기구 SDSN은 행복의 기준을 6가지로 정의하고 3년마다 이를 측정해 국가별 순위를 매깁니다. 기대수명, 사회적 지지, 자유, 부정부패에 대한 인식, 관용. 그리고 국내 총생산 GDP 등.
이 순위가 발표될 때마다 미디어에선 행복이 높은 나라들을 비결과, 선진국에 비해 낮은 한국의 행복의 순위가 인용됩니다. 한국은 2018년을 기준으로 160개의 국가 중 62위.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순위지만 행복은 차고 넘칠수록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행복의 나라로 떠나 살면 정말 행복할까요? 그들은 왜 행복한 걸까요? UN의 행복순위는 복합적인 요소가 반영되어 너무 막연하게 느껴지는데, 이중 극단적으로 한 항목이 뛰어난 나라를 소개하며, 행복의 기준에 대해 탐구해보고자 합니다.
*에릭 와이너의 책'행복의 지도'를 바탕으로 책에서는 소개되지 않는 사회적 지표를 더해봤습니다.
오늘 글에선 먼저 스위스를 다룬 뒤 다음 글에선 다른 행복한 나라 2곳을 더 다루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가볼 나라는 행복의 6가지 기준 중 사회적 지지가 높은 나라, 스위스입니다. 능률적이고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걸로 유명한 나라. 초콜릿이 맛있고, 또 아미 나이프(ArmyKnife)가 유명한 나라이기도하죠. 사회적 지지, 영어로 하면 Social support가 좋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나라의 속담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라는 말의 반대라고 생각하면 직관적일 것 같습니다. 국가가 양육과 교육, 노후, 심지어 죽음까지 국가가 책임진다는 이야기이지요. 요람에서부터 무덤까지 책임지는 큰 정부를 지지하기 위해 그들은 높은 세금을 부담합니다. 그들은 많은 세금을 내는 만큼 행복할까요? 행복에 대한 영감을 준 작가 에릭 와이너는 스위스 인들에게 ‘행복의 이유’를 물은 적이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다수 스위스 인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행복하지는 않고 만족하고 있어요.'
즉 스위스인들 스스로 보기엔 행복한 나라라기 보단 불행의 원인을 많이 제거해주는 나라였던 거죠. 불행이 없다는 게 과연 행복한 걸까요? 언뜻 타당해 보이지만, 우리는 이미 적당한 스트레스가 행복을 증진시키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위스 인들이 아무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 큰 정부의 나라에서 살고 있어서 행복하다고 결론짓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얘기하면 너무 결과론적인 얘기입니다. 불행을 잘 제거해주는 정부가 있지만 그것은 사회적 지지의 일부분일 뿐이죠. 스위스의 큰 정부가 제공해주는 진정한 사회적 지지는 정책참여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의 많음과 이웃과 공공기관에 대한 높은 신뢰에 있습니다.
스위스 시민 6134명을 대상으로 직접민주주의와 행복의 상관관계를 조사한 연구가 있는데요(브루노 프레이라), 놀랍게도 같은 직접 민주주의 체제란 속에 속해있지만 주민참여 회의가 많은 지역의 만족감이 더 높았습니다. 심지어 같은 지역에서 주민투표에 참여할 권리가 있는 사람들이 더 행복하다고 집계되었습니다.
그런데 스위스의 투표율은 고작 46.8%입니다. 그에 비해 대한민국은 평균적으로 56%인데, 그의 연구대로라면 정책참여 기회가 많은 대한민국이 더욱 행복한 국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대한민국은 행복하지 않을까요? 다소 모순적이게 느껴지는데 스위스 역사학자 클로드 롱샴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강력한 권력집중이 나타나는 국가는 높은 투표율로 이어지지만, 권력을 공유하는 사회는 투표율이 낮더라도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만족이 더 높다.
첫 번째로 우리는 투표권을 많이 행사하더라도 자기 표에 대한 효능감이 낮고, 이웃의 정치적 결정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반면 스위스인은 이웃의 결정을 신뢰하기 때문에 정치참여 방식에 대해 투표율이 떨어지더라도 만족률이 높다는 것이죠. 각종 중요한 대선이 끝난 뒤, 정치기사 댓글란만 보더라도 각자 여야 후보를 입에 담지도 못할 언어로 매도하고, 비난하는 글을 볼 수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경쟁에 너무 몰려 있어서 가끔 깜박하지만, 이웃과의 관계, 넓게는 직장 동료와의 관계부터 길에서 가볍게 마주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신뢰할 만한가?’는 행복을 높이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반면 대한민국 한 대학신문에서 청년들이 '젠더 갈등'이 존대한다고 믿는 수치는 약 95%. 직접적으로 '신뢰할 만한 이웃이 있다.'라고 물은 한 통계에서도 약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이웃을 신뢰할만하다고 대답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이웃을 믿고 있지 않은 것이죠.
또한 우리가 간과한 배경이 하나 있습니다. 그들이 인생의 불행을 잘 제거해 주는 큰 정부를 꾸릴 수 있는 것 또한 스위스인들이 이웃과 정부에 가지고 있는 높은 신뢰가 있기에 지속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만일 정부가 내가 납부하는 세금을 투명하게 사용하지 않고, 부정부패로 인해 잘못된 곳에 사용되고 있다고 믿는다면? 또한 이웃이 내린 정치적 결정에 세금이 낭비되고 있다고 믿는다면, 정직하게 세금을 내는 이들보다 탈세를 통해 빼돌리는 이들이 많을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까요? 우리는 이웃을 신뢰할 수 있어 행복에 보탬이 되는 환경 속에 살고 있을까요? 한국에는 많은 갈등이 존재합니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거만 해도 X세대와 베이비부머가 느끼는 정치적 이념으로 인한 갈등, MZ가 체감하는 세대 및 젠더 갈등부터 매일 뉴스에선 '갈등'이 점화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갈등이 꼭 이웃의 신뢰를 헤치는 요소는 아닙니다. 헤겔은 '정반합'의 변증법적 논리를 통해 갈등이 존재하고, 이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더욱 나은 사회로 발전할 수 있다고 갈등의 존재를 긍정하기도 합니다. 이웃을 신뢰할 수 있냐의 문제는 갈등이 발생하느냐 그 자체보다는 '갈등이 어떤 과정으로 해결되는가?'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연인 간의 다툼이 서로 진솔한 대화와 상호 이해로 더욱 깊은 관계로 발전하느냐, 아니면 일단 덮어두고 봉합했다가 나중에 곪아 터져 불신이 더욱 깊어지느냐의 문제처럼요.
스위스 쪽을 마무리하며 다시 반문해봅니다.
우리는 행복한 나라, 이웃이 신뢰할만한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나요?
답을 스스로 내렸다면 다음은 '자유로워서' 행복한 나라 네덜란드와 '돈이 넘치게 많아서' 행복한 나라 카타르로 떠나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