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 아니 에르노 『한 여자』
이 글을 쓰면서 때로는 <좋은> 어머니를, 때로는 <나쁜> 어머니를 본다. 유년기의 가장 먼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이 흔들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치 어떤 다른 어머니와 내가 아닌 어떤 다른 딸의 이야기인 것처럼 묘사하고 설명하려고 한다. 그래서 가능한 한 가장 객관적인 방식으로 글을 써나가고 있지만, 내게 몇몇 표현들은 (<그러다가 네게 불행한 일이 닥치면!>) 추상적인 다른 표현들(예를 들자면 <육체와 성의 거부>) 과는 다르게 객관적이 되지 않는다. 그것들을 떠올리는 순간, 나는 열여섯 살 때 꼭 그랬듯이 여전히 의기소침한 기분을 느끼고, 내 인생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던 그 여자와 할례 시술사가 클리토리스를 절제하는 동안 등 뒤로 어린 딸아이의 팔을 꼭 붙들고 있는 아프리카의 어머니들을 순간적으로 혼동한다.
- 아니 에르노 『한 여자』 (열린책들, 2012)
<오늘의 '한 여자'>
1호가 거실에 앉아 노트북을 하고 있다. 웃는 얼굴이다. 손이 분주하다. 영어 숙제를 하고 있다는 데.... 안다. 친구와 카톡 중이다. 어제도 밤 12시 넘게까지 안 자고 뭘 하고 있다. 방에서 뭘 하는지, 해야 할 건 안 하고 늦게 자는 일이 너무 잦다. 노트북을 9시에는 거실로 빼기로 정했는데 그것도 지키다 말다 한다. 나도 힘들고 지친 밤에는 체크를 못한다. 아이는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정작 밤이 깊어서야 학교 숙제가 있다며, 갑자기 분주하다. 순간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짧은 순간 머릿속에 어떤 상상이 조건 반사처럼 떠오른다. <가서 거칠게 노트북을 뺏고, PC 카톡을 지우라고 소리 지르는 모습>이다. 아주 오래전, 나의 한 여자가 내게 했듯이.
아이를 키우며 '때로는 <좋은> 어머니를, 때로는 <나쁜> 어머니를 본다.'
언니들과 나의 방은 2층이었다. 1층은 할아버지, 안방, 동생 방과 주방이 있었고, 대문을 나가 왼쪽 옆에는 엄마 가게가 있었다. 엄마는 늘 바빴다. 대식구 살림에, 가게까지 크게 했으니까. 여기 가도 일, 저기 가도 일. 집안의 강자는 할아버지, 가게의 강자는 손님.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엄마는 주기적으로 폭발하며 감정 쓰레기통을 비웠다. 그 대상은 우리 집의 가장 약자. 2층 방에 있는 딸 들이었다.
한 달에 한두 번쯤. 밤 9시쯤 되면, 갑자기 나무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평소의 발소리와는 사뭇 다르다. 분노의 발자국 소리다. 귀에 찍힌다. 두렵다. 왈칵 문을 연 엄마는 우리의 '더러운'방부터 공격한다. <너희를 키워 뭐 하냐. 나는 복도 없지>로 시작되는 레퍼토리와 함께 책상 위, 서랍, 책장 등이 헤집어졌다. 서랍을 갑자기 뒤집어 바닥에 쏟는다거나, 여기저기 쌓여있는 옷가지들을 던지기도 했다. 평소에는 괜찮던 것이 그날에는 온통 '더러운 것'이 되었고, 우리는 <엄마 등골을 빼먹는 천하의 몹쓸 딸년들>이 되었다. 엄마의 그 스트레스 해소는 약 2시간 정도 이어졌다. 언니들과 나는 꼼짝없이 당한다. 조금 커서는 영혼을 분리하는 법을 익혔다. 엄마가 뭐라고 하든. 멍하니 기계적으로 엄마가 던질 걸 주워 다시 제자리에 두고, 버리라는 걸 버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였다. 그렇게 이 시간을 영혼 없이 보내야, 그 칼날에 베지 않을 수 있었다.
좋은 음식만 골라서 먹이고, 딸들의 아이들을 봐주며(때론 등록금도 주며) 대학원에 보내는 <좋은> 엄마. 그 엄마는 동시에 이런 <나쁜> 엄마이기도 하다.
"나는 어머니의 폭력, 애정 과잉, 꾸지람을 성격의 개인적 특성으로 보지 않고 어머니의 개인사, 사회적 신분과 연결해 보려고 한다. 그러한 글쓰기 방식은 내 보기에 진실을 향해 다가서는 것이며, 보다 일반적인 의미의 발견을 통해 개인적 기억의 고독과 어둠으로 빠져나오게 돕는 것이다. 하지만 내 안의 무언가가 뻗대고 있고, 어머니에 대해 순수하게 감정적인 이미지들을, 온기 혹은 눈물을, 의미 부여 없이 그대로 간직하고 싶어 함을 느낀다."(p51~52)
아니 에르노의 매우 적절한 이 문장들처럼, <어머니의 개인사, 사회적 신분>과 연결 없이 <개인적 특성>으로 보는 것은 아주 폭력적이다. 일찍 어머니를 잃은 나의 엄마가 어린 시절부터 받아야 했던 수많은 차별과 기회의 박탈, 결혼 후에도 그 수많은 일들을 감당해야 했던 어머니, 이를 방조하고 방관하며 스스로에게 유리한 것(가부장)만 지키며 어머니의 희생을 강요했던 아버지와 시아버지, 무엇보다 이 모든 걸 당연시했던 사회와 시대. 그 누구도 자신이 속한 사회의 기준에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 없으니까.
동시에 <순수하게 감정적인 이미지들을, 온기 혹은 눈물을> 그대로 전하는 것 역시 폭력이다. 무엇보다 우리 어머니는 (적어도 나에게는. 남동생에게는 아주 다른 분이었다) 그런 면만이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런 식의 부풀린 모성은 무엇보다 내게 독이 될 것이다.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읽고, 『세월』 을 2/3 정도 읽다가 접었다. 프랑스의 사회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나에게 『세월』은 너무나 생경해서, 읽어 나가기가 어려웠다. 대신 도서관에서 『한 여자』를 빌렸다. 얇기도 했지만, 나의 <한 여자>가 생각나서 오고 가는 지하철에서 다 읽었다.
성남에서 지하철을 타고 오는데, 죽전에서 갑자기 내리라고 했다. 이 열차는 죽전행이었다. 몰랐다. 알았으면 그전에 내려 기다렸을 것이다. 죽전은 지상이라 추우니까. 플랫폼 위에는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 옷을 여미며 다음 열차를 기다리다, 마지막 부분까지 다 읽었다.
내가 훌훌 읽어간 이 얇은 책을 쓰는 일이, 아니 에르노에게는 추운 플랫폼에서 오지 않는(오긴 온다는 건 머리로는 알지만, 지금 당장은 너무 춥고 보이지 않는) 열차를 기다리는 기분 같았겠단 생각이 들었다. 춥고 외롭고 아련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여기서 떠나고 싶지만, 저 열차 외에는 방법이 없음을 아는 이의 쓸쓸함. 그런 복잡한 감정들. 이 플랫폼을 빠져나가 따뜻한 택시를 잡아타고, 편한 길을 가고 싶다는 욕구가 들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결연함.
여전히 아니 에르노는 모르지만, 『한 여자』를 읽고 그가 조금 좋아졌다. 그의 곧은 문장 사이로 스민 물기의 흔적이 보여, 내 마음이 그쪽으로 스민다. 드디어, 인천행 지하철이 온다는 알람이 울린다. 이제는 나도 지하철을 타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