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 박서련 『체공녀 강주룡』
그따위 결속이 다 무어란 말인가. 여자 하나를, 어린 남자애 하나를 우스개로 만들지 않고서는 유지할 수 없는 결속이라면 그따위 것 없는 게 백번 낫지 않은가. (p79)
누가 나더러 모단 껄이 아니라 했다고 내가 정말 모단 껄이 아닌 것은 아니다.
자기가 모단 껄이 아니라는 것, 모단 껄 되고 싶은 심정이 언감생심으로 보이리란 사실은 주룡 자신이 가장 잘 안다. 언제나 그것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으니 도무지 모를 수가 없다.
그렇지만 그것이 반장 때문은 아니다.
반장 같은 것은 모단 껄 되기에 요만큼도 방해가 될 수 없다.
구남성의 박해를 받았으니 이는 도리어 모단 껄 되기의 제일보에 진입한 것이다.
주룡은 그런 생각으로 남은 업무를 버티고, 기어이 집에 가서 울음을 터뜨린다.(p140)
세상에 싸우기 좋아하는 이가 있답데까? 싸우구 싶다는 거이 순 거짓입네다. 싸움이 좋은 거이 아이라 이기구 싶은 거입네다.(p216)
하늘로 올라가는 길처럼 빛나는 광목을 주룡은 단단히 붙든다. 사실은 두려워서 죽을 것 같은 표정이면서, 사실은 살고 싶어서, 그 누구보다도 더 살고 싶어서 활활 불나고 있으면서.
지붕 위에서 잠든 그 여자를 향해 누군가가 외친다.
저기 사람이 있다. (p242)
- 박서련 『체공녀 강주룡』 (한겨레출판, 2018)
<오늘의 '오른다'>
강주룡은 높은 곳에 고공농성을 한 최초의 노동자다. 하얀 광목을 사서 줄을 만들고, 을밀대(고구려 때 만들어진 누각) 위로 올라온 강주룡. 그는 76시간 단식을 하며, 노동착취를 알렸다. 그의 메시지는 또렷했다. "옳지 않다"는 것이 그것이다.
'열심히 일했지만, 임금이 깎였고 파업을 했더니 쫓겨났다. 부당하다고 생각해 나는 여기에 올라왔다. 나의 임금은 비단 나의 임금만이 아니다. 자신의 임금이 깎이면 다른 노동자의 임금이 깎일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없다.'
당시 강주룡의 이야기는 신문에 보도되었다. 소설가 박서련은 이를 탁월한 상상력으로 복원해 냈다.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7306&docId=3435225&categoryId=47306
박서련 작가의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을 읽고 작가가 그려내는 인물의 입체감에 놀랐다(아래 링크 참조). 박서련 작가의 등장인물들을 납작하지 않다. 겹겹이 쌓인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 이면에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우리의 이야기'가 들린다.
https://blog.naver.com/fullmoonmind/222835785579
대전에서 반성매매 운동을 하는 한 활동가를 인터뷰했다. 구도심에 위치한 그 단체의 건물에는 시간이 켜켜이 쌓여있었다. 사무실은 4층이었는데,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나야 상관없었지만, 한 명은 다리를 다쳤고, 촬영팀에게는 카메라와 조명 등 장비가 많았기에 이동이 쉽지 않았다. 그 낡은 계단을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 천천히 올라가다 보니 휙 지나갔으면 몰랐을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건물의 오랜 동반자일 넝쿨. '과연 인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품게 만드는 정체불명의 문구로 가득한 벽 광고. 페인트가 벗겨진 낡은 계단. 쪼그려 앉아서 이용하는 오래된 화장실. 이 모든 낡음을 지나자, 활동가의 사무실이 나왔다.
사무실 안은 넓고 쾌적했다. 우리는 카메라를 세팅하고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의 질문과 답변은 조심스럽기도 하고, 어렵기도 했는데. 그것은 그가 하는 활동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인터뷰 말미에 피디가 추가질문이 있다며 '이런 활동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이며, 왜 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활동가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자신을 포함해 많은 활동가가 듣는 질문이라며 그는 말했다. "우리는 증인이에요.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기록하고 증인이 되어야 하는데, 그 역할을 하는 게 우리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대단한 사명감, 고귀한 의식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알게 된 이상 그냥 지나가지 못해 여기 있다고 했다. 대단한 무엇을 보고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냥 지나치지 못해서.
그와 단체가 함께 만든 책의 제목은 '도시의 섬'이다. 거기 있지만, 거기 없는 것처럼. 백 년 넘게 여기지는 성매매 공간. 그 '섬'에 대한 이야기.
'아무도 하지 않기 때문에 한다'라는 그의 말이 키워드가 되어 책이 읽혔다. 책 속에서 만난 성매매 집결지 대상자 여성들, 집결지 상인, 활동가, 빈민 운동가들의 각자가 언어가 담겨있었다. 그 언어들은 딱 그들만이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 서로 다른 기억이 모여 '입체적인 역사'가 되었다. 아무도 묻지 않았기에 세상으로 나오지 않았던 말들이었다.
강주룡이 을밀대에 광목천을 묶어 올랐듯, 이들도 매일 엘리베이터 없는 계단을 오르고 있다. '이 일로 세상이 바뀐다'가 아니라, 거기에 있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나 외에 다른 사람은 없으니까. 눈앞에 보이니까. 그들은 위로가 되는 넝쿨, 이상한 벽 광고를 지나 낡은 계단을 오른다.
무엇보다 "저기 사람이 있으니까" 그들은 오늘도 오르지 않을 수 없어서, 그 계단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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