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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작 Aug 27. 2020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 갈 뿐인 게 아닌가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ㅣ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 갈 뿐인 게 아닌가." 

-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오늘의 생각>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우리는 단기 출가에 참여했다. 독실한 불교신자 한 명. 천주교 신자 한 명, 그리고 어중간한 나. 이렇게 셋이었다. 20살짜리 아이들이 왜 갑자기 (클럽이 아닌) 템플스테이에 참여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암튼, 우리에게는 어떤 환상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산사에게 명상하고, 큰 깨침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그런 환상 말이다. 

  그러나 템플 스테이 문화가 막 만들어지던 초창기여서 그랬던 건지, 그 절이 그랬던 건지. 아니면 우리가 20살이라 그랬던 건지 (지금 생각하니, 20살이라서가 가장 큰 이유구나. 아하! 큰 깨달음이다.)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스님의 설법이라는 것은 전혀 대중(그러니까 우리 같은 젊은이)을 고려하지 않았다. 나는 졸린 눈을 간신히 뜨고 그야말로 멍을 때렸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 나오는 아둔한 중생을 깨쳐줄 그런 멋진 스님은 어디 있단 말인가. (라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던 것도 같다. 결국 스님 탓이 아닌 나의 탓인 것을! 죄송합니다. 스님) 

  물론 좋았던 기억도 있다. 또 여지없이 지루한 스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왔다. 법당의 지붕을 타고 빗소리가 음악이 되어 흘러내렸다. 법당 마루에 앉아 똑똑똑 떨어지던 비를 느꼈다. 작아졌다 커졌다 하는 빗소리. 나뭇잎 위, 돌계단 위, 처마 위에서 각기 다른 춤을 추며 떨어지던 그 비. 산사에서 보고 들은 빗소리는 지금도 선명하다. 

  아삭하고 신선하고 놀랍도록 맛있었던 발우공양도. 잊히지 않는다. 재료 본연의 맛들이 입안에서 머물다가 상큼하게 사라졌다. 김치 한 조각조차 다른 식감을 가지고 있었다. 발우공양은 고춧가루 하나도 남겨서는 안 된다. 그릇을 씻기 위해서 단무지나 김치 한 조각을 남겼다. 처음에는 이걸 어찌 먹나 했는데, 거부감이 없었다. 맛있어서 싹싹 긁어먹었다.   


  암튼. 이런 좋았던 기억을 뚫고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밤의 법당에서 만난 보살님들에 대한 기억이다. 우리만 어리고, 다들 어머님 연배였다. 큰 법당에서 같이 잤다. 산사의 여름은 서늘했다. 떠들고 놀다가 자려고 보니 바닥이 차가웠다. 그제야 깔개가 있었으나, 다들 차지하고 이제는 없다는 걸 알았다. 돌아보니 보살님들 중에 깔개를 2개씩 가져간 사람이 제법 되었다. 행동도 느리고 눈치도 없었던 우리에게 돌아 올 깔개는 없었다. 지금이라면 가서 부탁했을 텐데. 어린 우리는 그런 말도 못 하고 얼기설기 얇은 옷을 꺼내 깔고 잤다. 

  그 밤 차가운 법당에 누워 나는 생각했다. 서러움, 실망감, 짜증 남. 추위로 몸과 마음이 뻣뻣해졌다. 


  새벽 4시. 스님이 우리를 깨웠다. 108배를 하는데 뻣뻣한 마음과 몸에서 온갖 상념이 뛰쳐나왔다.  

  말로만 하는 '부처님의 자비'란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부처님의 자비의 말씀을 듣고, 따르고자 공부하는 보살님들이 맞단 말인가.' 절을 하면서도 옆에 선 보살님과의 거리가 우주처럼 멀어졌다.        

  그러니까 김초엽 작가의 소설 속 표현을 빌리자면, '사랑과 자비가 전 인류(우주)를 향해 뻗어 나가기만 하면 무엇을 한단 말인가. 어차피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는 인간인데. 옆에 남겨진 사람들의 추위 따위는 생각조차 못 하면서. 외로움의 총합'만 늘리는 게 아닌가. 란 생각이었다. (물론 당시의 나는 이런 식의 아름답고도 철학적이며 문학적인 표현과는 거리가 먼 '투덜거림'이었다.) 


 당연히 마음이 곱게 써질 리 없었다. 출가를 끝내고 내려가는 길 입구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입안이 텁텁했지만, 소주로 씻었다. 그리고 '하하하' 웃으며 털었다. 20살이었으니까.   


  이제 와 생각하면, 정말 몰랐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든다. 그리고 가서 이야기했으면, 기꺼이 내어주셨을 것이다. 나도 그 보살님 나이에 가까워지니 나이를 먹는다고 특별히 더 큰 사람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겠다. 아니 오히려 더 좁아지기가 쉽다. 악한 마음이나, '나만 2개 덮어야지!!' 하는 마음이라기보다는, 살짝 외면하고 싶은 마음. 딱 그 정도의 약은 마음이 더 커진다. 


  더 넓은 세상. 더 편한 세상. 그 끝에는 뭐가 있을까. 어차피 빛의 속도로 갈 수도 없는데. 그렇게 넓어진 공간을 채우고 있는 건 뭘까. 몰랐다는 (비겁한) 변명 대신, 살짝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생각해본다. 




나사에가면 내 생일에 찍은 우주사진을 보여준다. 보다 보면 겸허해진다. 


나사의 허블우주망원경이 나의 생일날 찍은 우주의 모습 


https://www.nasa.gov/content/goddard/what-did-hubble-see-on-your-birthday






이글은 블로그에도 있어요;; 

https://blog.naver.com/fullmoonmind/221819000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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