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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작 Aug 25. 2020

한 사람의 자유는 모든 이들의 연대에 달려있다

천관율, '우리는 '미국식 자유'와 분명히 결별한다' <시사인 666>ㅣ


미국에서 생각하는 자유란 '간섭으로부터 자유'다. 자기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면 그는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마스크를 쓰기 싫어도 써야 할 때 자유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방역정책은 자유의 적이다. 북유럽이 생각하는 자유는 ;위험으로부터의 자유'다. 자유란 의존이 최소화된 상태다. 위험은 의존을 낳는다. 그러므로 위험이 자유의 적이다. 자유롭고 싶다면 위험을 다루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
(중략)
사회보장은 '원금 보장'이 아니라 '위험으로부터의 보장'이다. 보험 가입자는 자기 수명을 놓고 도박을 한 사람이 아니라, '위험으로부터의 자유'를 산 사람이다. 연금의 경우 '경제력 없이 장수할 위험으로부터의 자유'를 사는 셈이다.
(중략)
부르주아는 인간이 혼자서는 스스로의 안녕을 보살필 수 없고, 모든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의 결합에 기대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폐결핵이 유행하는 상황을 예로 든다. 다른 사람과 만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지만 누가 보균자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각자가 다른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만이 유일한 답이다. 코로나 19 유행기를 사는 우리는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접촉을 늘리면 감염병이 돌고 접촉을 끊으면 경제가 죽는 진퇴양난에서, 유일한 활로는 외출을 자제하고 손을 씻고 마스크를 쓰고 2m 간격을 지키는 일련의 행동이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남을 보호하는 행동이고, 다른 이들도 그렇게 나를 보호해 줄 거라고 믿는 행동이다. 부르주아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사회적 도덕의 기초를 발견했다. 나의 고유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지킬 의무를 지는 것이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향한 의무를 다할 때에만 나의 자유를 지킬 수 있다. 이제 연대는 자유로 가는 길이 된다.
연대는 동료 시민들의 서로 돕는 일이지만, 자선과는 거의 정반대일 만큼 다르다. 자선이 시혜적이라면, 연대는 상호 의무로 묶인 관계다. 자선이 누군가의 불행을 안타깝게 여기는 접근이라면, 연대는 위험을 분산시키는 공동의 노력이다. 그래서 보험은 연대의 한 종류다. 예측할 수 없는 위험에 대응하는 연대를 제도화하면, 그게 보험이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역사가 프랑수아 에월드는 "연대의 이념은 구호사업이 아니라 보험의 경제학에 속한다"라고 했다. 부르주아가 주창한 '상호 의무의 거미줄'은 이 장면에서 보험이라는 제도적 실체를 얻는다. 강제가입은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박탈한 것인가? 연대의 문화가 자리 잡은 공동체에서는, 그렇지 않다. 연대는 상호 의무의 거미줄로 서로를 묶어서 '위험으로부터의 자유'를 확보하려는 공동의 노력이다.
(중략)
사회보험은 연대의 특수한 형태다. 그리고 연대는  사회보험이 논리적·실천적 난점을 뛰어넘도록 해주는 힘이다. 공정의 직관이 내놓는 문제 제기에 선진 복지국가들이 내놓는 대답도 연대의 원리였다. 옌뉘 안데르손은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이데올로기를 연구하는 스웨덴 출신 연구자다. 책 <경제성장과 사회보장 사이에서> 그녀는 1950년대 스웨덴 사민당의 이념을 이렇게 요약한다. "경제가 급속히 변화하는 사회에서 개인의 해방은 사회안전망에 전적으로 좌우된다. 사회안전망이 있을 때에만 모든 사람의, 특히 변화에 취약한 사람의 선택의 자유, 인생의 기회, 잠재적 역량이 비로소 보장된다. 한 사람의 자유는 모든 이들의 연대에 달려있다." 그러니까 북유럽의 이 지독한 개인주의자들은 자유롭고 싶어서 연대를 택했다.  

- 천관율, '우리는 '미국식 자유'와 분명히 결별한다' <시사인  666호>

<오늘의 정의>


'공동육아가 왜 이래?

공동육아를 하는 이라면 누구나 한 번(이상)은 하는 질문(혹은 공격 혹은 독백)이다. 왜 이 질문은 반복되는가. 나는 각 터전에 '공동육아'에 대해 명확하게 정의가 없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공동육아가 처음 자리 잡던 시절에는 합의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공동육아'의 등장 원인이 척박한 우리 교육 현실의 반작용, 즉 '사회 운동'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공동육아는 주류 교육과 전혀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는 비주류였고, 보색 대비 효과로 또렷해 보였다.

그러나  이제 그렇지 않다. 공동육아가 지향해온 교육의 큰 틀 - 자연친화적으로, 인지교육보다는 아이의 발달 과정에 맞게, 즐겁게 놀 수 있도록 하는 -은 이제 보편적이다.


그래서 각자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공동육아를 시작한다. 큰 틀에서는 합의하지만, 세부적인 사항은 다를 수밖에 없다. 자연히 '우리가 생각하는 공동육아란 무엇이다'에 대한, 사회적(조합의) 합의 없이 이루어지는 터전 생활은 삐거덕거릴 수밖에 없다. 같은 단어를 뱉지만,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린다.

공통이 합의한 정의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큰 방향성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구체적 실천 속에, 제도 속에, 교육 속에 각 터전마다 도출해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귀납적 정의다.

천괸율기자의 기사는 줄을 그으며 읽게된다.

미국의 자유와 북유럽의 자유도 서로 다른 토양에서 자라, 완전히 반대의 길에 도달해있다. 이에 대한 이해 없이 표피만 이해하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정확한 자유에 대한 설명을 읽다 보니, 그 사회의 여러 가지 모습이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정의가 무엇일까. 우리는 어떤 사회로 나아가야 할까 고민할 수 있다. 무엇보다 개인의 자유가 연대에서 나온다는 명제가 당위성이 아닌 논리로 설득이 되었다.


오늘 우연히 어떤 분의 이야기를 들었다.  '행복한, 다양한, 긍정적인, 즐거운, 보람찬' 수많은 추상적 단어들이 오고 갔다. 설명을 들으면서 끄덕여지는 부분도 있었지만 많은 부분이 와 닿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긍정'인가? 난관 앞에서 '다음에 하지 뭐.' 하고 좋게 생각하는 것이 긍정적인 것인가. 절대 포기할 수 없어하고 긍정적으로 다시 도전하는 것인가? '긍정'이라는 단어는 같지만 행동은 반대다.


자신이 가진 개념이나 신념을 누군가에게 설명하거나 설득할 때는 추상적 단어가 아니라, 구체적 정의가 필요하다. 그 정의는 지금까지 나의 과정 속에서 도출할 수 있다. 특히 다른 이들과 함께 무엇을 도모하고자 할 때는 더욱 그렇다.

만약 추상적 단어만 남발하고 있다면, 일단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구체적 사례를 통해 자신이 추구하고 말하는 '이 개념'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 필수다. 설명할 수 있어야, 정말 자기 것이다.  



표지 사진 출처 : [영화] 다가오는 것들 




이글은 블로그에도 있어요 ;;

https://blog.naver.com/fullmoonmind/222009228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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