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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작 Sep 04. 2023

십이 세는 영업이 부끄럽다고 했다

- 중년은 영업은 아니라고 했다

  며칠 전 학부모들과 논의해 선생님들을 응원, 지지하는 현수막을 달았다(검은색에 근조 리본이 달렸으면 더 좋았을걸 싶지만). 미약하다. 그래도 학부모 대표님이 선생님들이 좋아하셨다고 했다. 좋아하셨단 말이 어쩐지, 슬프다. 당연한 이야기를 써서 거는 이런 현수막 따위는 필요 없는 정말, 다른 우주에 살고 싶다.



하늘은 맑고 숲은 푸르다. 그리고 학교가 여기에 있다. 선생님들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일요일 저녁, 내일 어떻게 까 고민을 했다. 사실 진작 체험학습을 내야 했는데, 안일했다. 아이가 급식이 집밥보다 맛있다고 학교 빠지는 걸 싫어하는 게 컸다(사실 나도 학교 보내고 싶고... 허허허). 그러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만약 어쩔 수 없이 선생님이 학교에 계셔야 한다면, 아이가 있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대신, 모른 척하고 싶진 않았다.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편지는 너무 길고(그렇게 할 말이 있진 않...), 엽서만 덜렁 보내긴 좀 그래서 고민하다, 내 책을 드리기로 했다. 비록 나온 지 오래됐으나... 허허허. 드리는 명분이 있으니.


  책 앞에 메모를 쓰고, 나름 포장해서 아이에게 줬다. 앞의 글도 보여주면서, 내일 선생님께 이 책 좀 가져다 드려하니, 2호(6학년, 십이 세)는 "뭐야, 지금 영업하는 거야? 선생님이 인터뷰하실 일이 있을까?"라며 웃는다. 허허허. 잠시, 딴생각 (이런 애는 안 보내는 게 선생님 정신건강에 좋나? )을 하다 집회 사진을 보여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크게 임팩트가 없는 것 같아서, "00와 00(공동육아를 함께한 엄마들 중 선생님들 별칭)도 매주 이 집회에 나가고 있어. 지금 얼마나 마음이 힘드시겠니. 응원해야지" 하니, "아! 그래!" 한다.




  1호(중2, 십오 세)에게 줬더니, 역시나 그다지 따뜻하지 않은 눈빛이다(사춘기는 무섭다). 앞에 쓴 글을 보여줬더니 대충 휙 보더니 (안 읽은 듯) "우리 학교는 이런 거 전혀 없는데!" 한다. "네가 모르는 거지. 지금 선생님이라면 누구나 마음이 그래!" 하니, 몹시도 공허하게, "아... 안 잊음 드릴게"라고 한다. 허허허. 별건 아니지만, 작은 힘이 되길 바란다. 그러니, 잊지 마라. 이것들아.



추신)

 1. 다행히(!) 2호(십이 세)의 선생님은 학교를 안 오셔서, 책 전달을 못했다. 학교 다녀온 십이 세는 다시 말했다. "엄마, 굳이 영업을 해야겠어? 편지만 쓰지 그랬어!" (허허허. 영업 아니라고!! 선생님께 내가 무슨 영업을...!!)


 2.  1호(십오 세)의 가방에 책을 넣다 보니, 남편의 우산이 보였다(집에는 장우산뿐이라, 가방에 넣어 다닐 작은 우산을 사서 넣고 다니더라. 세상에, 나한테는 없는 준비성이다. 나는 비 예보가 있어도 지금 당장 오지 않으면 잘 안 들고 다닌... 허허허. 근데 그 우산을 또 1호가 뺏어서 들고 다니네).

  십오 세에게 그전에 네가 들고 다니던 우산은 어디 갔어?라고 물었다. 아주 가벼운 우산이 있어서, 그걸 가방에 꽂고 다녔었다. 십오 세는 갑자기 '아~?' 하더니, 혹시 가방에 있나 하고 뒤진다. 역시 있다. 쓰레기와 함께! 그동안 우산을 두 개 들고 다녔네. 허허허. 이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 쓰레기 더미의) 가방에 담긴 책은 잘 전달될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잘 전달됐고, 선생님에게 정성스러운 답장도 왔다. "덕분에 꽤 괜찮은 마음으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라고. 아, 고마워라. 혹시 누가 될까, 선생님의 문자 일부와 내 답장만 공개한다.


 

꽤 괜찮은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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