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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수정 Apr 12. 2024

껍데기 말고, 알맹이는 뭔데?

껍데기와 알맹이 사이

마케터로서 초년기 때였다. 상사가 지시한 일을 열심히 준비해서 보고하러 들어갔다. 잘해야겠다는생각에 온갖 미사여구, 유식해 보이는 단어, 엄청난 만연체를 사용했다. 한마디로 뭔가 있어보이게 말하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난다. 말하는 나도 내가 뭔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고맙게도 상사는 나의 말을 끊지 않고 들어주었다. 한참을 인내심있게 다 듣고 나서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계속 그렇게 뭔가를 얘기할 수있는 것도 능력이다. 그래서..... 껍데기 말고, 알맹이가 뭔데?"


타인을 설득하려면 곧 내가 먼저 설득되어야 하는데, 핵심 생각은 없고, 말의 스킬로 설득하려 했던 웃지 못할 에피소드이다. 설득이 곧 일인 마케터는 누구에게 무언가를 보고할 일이 잦다. 게다가 제안 PT나 월간 마케팅 종합보고와 같이 철저한 준비는 물론 압도하는 보고 실력으로 상대방을 장악해서 승리(?) 해야 하는 경험도 흔한 일상이다. 예전에 나는 이런 보고를 할때 발음이나 속도 등 말하는 기술에 집중되어 있었다. 한번의 보고를 위해 녹음을 하고 듣고, 다시 녹음을 하고 듣고를 수차례 반복해서 거의 토시하나 안 틀리게 다 외운 상태로 들어갔다. 결국 보고 후 ' PT 잘하네요'라는 소리는 들었지만 계약으로 성사되거나 마음으로 교감하는 일은 적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말의 껍데기를 들어내야겠다고 결정한 다음부터는 PT를 할 때도 페이지마다  A~Z까지를 다 말하려고 달달 외우지 않는다. 이 페이지에서의 알맹이는 이것이야, 그 하나의 메세지를 완벽히 이해하고, 알맹이 키워드 하나만은 꼭 잊지 않고, 언급하려고 한다.(그 알맹이 키워드 하나 찾으면서 그 페이지가 완전히 내것이 된다).  그 후 장기적인 브랜드 성장을 위해 브랜드 컨셉과 마케팅 전략을 보고한 적이 있다. 보고 후 클라이언트는  "시안이며 전략 모두 마음에 들고, 나아가 브랜드의 비전을 보여줄때는 마음의 깊은 울림이 있었다"고 말했는데, 결국 알맹이의 힘이 무엇인지 새삼 깨닫게 하는 순간이었다. 


알맹이 원칙이 적용되는게 어디 '말' 뿐인가? 나의 시간에도 알맹이가 있고, 껍데기가 있다. 시간관리에 대한 무수한 책들, 강연들, 유튜브 채널등 만 봐도 얼마나 이 시대 사람들이 시간관리에 진심이고, 고민이 많은지 새삼 가늠이 된다. 내게 주어진 24시간을 껍데기처럼 써서도 안되지만, 전부 알맹이처럼 쓸 수도 없다. 특히 초보일수록 시간이 없다.  내가 그랬다. 항상 바쁘고, 항상 시간이 부족했다. 시간의 강약중간약을 무시하고, 모두 강강강으로 쓰려 하니 시간에 치였고, 결과는 미약했다. 내 시간 스타일을 살펴보니 나는 남들이 없을 때 일이 더 잘되고 집중이 높아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무렵 7시까지 출근해서 10시까지 하루의 중요한 할 일을 거의 해치워버렸다. 나머지 시간엔 숨통을 놓아주고 여유를 주니 중심 시간의 밀도가 더 높아졌다. 일의 강도가 높아지는 게 아니라 생산성이 높아져 시간을 더 행복하게 쓸 수가 있었다.


점차적으로 많은 회사들이 요즘엔 코어 시간이라고 해서 그 시간에 집중해서 일을 처리하고, 나머지 시간은 보다 자유롭게 허용하는 분위기이다. 나는 유독 겨울에 약해서 겨울에 정말 많이 아프다. 주치의 병원에서는 나더러 겨울철에 아예 따뜻한 동남아에 가서 재택근무를 하라고 제안했을 정도이다. 그래서 요즘은 나의 계절성 정서장애(SAD:seasonal affective disorder) 를 인정하고, 겨울철에는 남들보다 좀더 긴 휴가를 잡는다.

 

이는 일명 전체 결과의 80%가 전체 원인의 20%에서 일어난다는 파레토 법칙(이탈리아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의 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이 파레토 법칙은 실제로 사회 여러 분야에서 보이는 현상이지만 이는 관찰된 패턴일 뿐 물리학 법칙처럼 절대적인 원리는 아니다. 경영학적으로는 수긍이 되는 부분이 있지만(20% 우수직원 집중, 20%의 핵심제품이 효자 등), 인문학적 관점으로 봤을때나( 왜곡된 엘리트 지상주의 우려)  80%의 비주류 상품이 주류 매출을 뛰어넘는 최근의 사회현상(아마존에선 매출의 절반이 비인기 서적에서 나오고, 기존에 소위 블록버스터 위주의 시장이 마니아 중심 시장으로 변화 등)을 봤을때 나는 파레토 법칙을 100% 지지하지는 않으며, 이 법칙을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고집해야 할 것과 포기해야 할 것을 알고 선택하자는 것이다. '에센셜리즘'의 저자인 그렉 맥커운은 선택하는 능력을 망각하면 학습된 무기력이나 모든 일을 해내려는 상태에 빠진다고 경고했다. 노력이 과하면 오히려 원하는 결과를 얻기가 더 어려워진다고 하면서 중요한 몇 가지를 선택하는 능력이란 결국 내가 하는 일의 본질, 삶의 본질을 꿰뚫는 것이라 강조했다. 좋은 선택이란 인생에서 어떤 도전, 갈림길, 결단과 마주하게 되었을때 비본질적인 것을 버리는 기술에 있다. 


그 선택의 중심에는 핵심적인 본질이 무엇인지 구분해내는 것과 더불어 나의 애호를 발견하는 것도 포함된다.  결국 애호를 발견하면 본성을 따라 사는 삶이 된다. 말이던 생각이던 시간이던 모두 본질을 잘 찾아내서 집중하는 것이 일의 역량을 그리고 삶의 질을 높인다.  더 나아가 죽어라 일하고 인정과 보상으로 연명하는 삶이 아니라 삶의 순간마다 일상 자체에서 기쁨을 느끼고 의미를 맛보니 나만의 보람있는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알게 된다.  그렇기에 중심가치를 안다는 것은 그만큼 나답게 살 수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자기만의 알맹이로 채워진 삶은 그만큼 자유롭다. 자신만의 줏대로 자신만의 자연스러움으로 나만의 속도로 한단계씩 나아질 수 있다. 그러니 우린 매일 이 질문과 마주해야 한다. 


"그래서 알맹이가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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