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인줄 알았다.
평상시처럼 직원 두 명에게 컨텐츠 수정사항을 전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날 내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또 다른 날은 외부 미팅을 마치고 일어서는 참이었다. 상대측 대표가 ‘오늘 미팅 참 편안했다’고 배웅인사를 한다. 서로 긴장해야 할 미팅에 편안했다고? 나는 그 말이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되어 괘씸해하며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 다짐을 했다.
내 말의 속도와 걸음은 항상 빨랐고, 주변 사람들은 나더러 ‘좀 쉬어라 숨이 막힌다’고 했다. 이런 일들 가운데 들었던 생각은 요즘 일이 좀 많은가보다, 예민해졌나보다 했다. 스트레스를 잘 받으면서 쉬지는 못하는 성격때문에 번아웃이 왔구나 싶었다. 일을 조금 줄여야겠다고 지킬 수 없는 막연한 다짐을 했다. 일부러 조금 늦은 출근과 이른 퇴근을 하고, 집중안되지만 명상도 하며, 억지로 산책을 했다. 머리와 몸은 동떨어진 채 뭔가를 하고 있다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다음과 같은 증상들이 더욱 심해지고, 정상적인 생활에 지장이 오기 시작하면서 ‘진짜 내가 이상하구나’를 알아차렸다. 나의 변화를 느낀 친한 지인이 병원에 가보라고 권했을 때도 처음엔 부정했다. 일이 많고 지쳐서 그런 걸꺼야 하고 위안했지만, 결국 마지못해 반신반의하며 병원에 들어섰다. 진단 결과 내 우울의 정도는 심한 상태였고, 진료실에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눈물을 흘리고는 약을 처방받아 나왔다. 내 증상은 다음과 같았고, 이것은 보편적인 우울증 증상이었다.
1.분노가 심해진다.
화가 너무 쉽게 나고, 그 분노의 정도가 심하다.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의 미움이 생기고, 곧 그 감정으로 인해 자책하게 된다.
2.무기력이 생긴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머리가 멍해 1-2시간이면 할 수 있는 일을 처리 못하고, 다음날로 넘기다가 결국 일주일을 넘겨버린다. 3년 동안 주 2회 규칙적으로 해왔던 운동가는 게 발이 떨어지지 않을만큼 무기력이 심해져서 결국 중단해버렸다.
3.기억력이 저하된다.
이름이나 카드 비밀번호 등을 갑자기 잊어버린다. 커피빈에 가서 투썸앱에 들어가 메뉴를 주문하는 등 단기기억 오류와 같은 인지적 장애가 생기기 시작했다. 너무 심해서 뇌에 문제가 생겼나 검사를 받아야 하나 고민을 했을 정도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인지능력의 저하는 대표적인 우울증 증상이다. 뇌졸증에 걸리거나 뇌를 외부에서 심한 충격을 받지 않은 이상 치매나 뇌기능의 문제는 생길 수 없다는 것이 의사의 말이었다.
4.불면증이 오기 시작한다.
잠도 잘 들고, 잘 자고, 업어가도 모르던 내가 잠을 못 이루기 시작했다. 새벽 3시-4시까지 잠이 안오는 수면장애로 수면패턴에 심각한 이상이 생긴다.
5.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에 대해 확대해석을 한다.
사람들의 시선을 왜곡한다.(나를 무시한다. 비웃는다. 욕한다) 친한 사람과 말도 안되는 다툼이 많아진다.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이 많아지고, 나아가 미래에 비관적이 된다.
6.의사결정에 어려움이 생긴다.
나는 내가 집중하기만 하면 뭐든지 할 수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그렇게 모든 일을 몰입과 자신감으로 했다. 하지만 이 무렵 자신감 자존감이 하락되면서 모든 결정이 어려워졌다. 나만 부족한 것 같고 너무 덧없게 느껴지는 감정이 너무 당혹스럽고 힘들었다. 점심 메뉴 정하는 것도 힘들고, 입고 나갈 옷 하나 고르는데도 에너지가 너무 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지만, 결국 약을 먹는 행위가 내가 ‘우울증을 받아들였다’는 싸인이 되면서(물론 약물의 효과도 있을것이다) ‘도대체 왜 이러지?’에서 ‘치료하겠다!’라는 방향의 전환이 생겼다. 분노감정이 좀 가라앉자 좋아진 증상에 대한 긍정적 인식과 내가 극복하려는 의지가 더해져 해보겠다는 의욕이 생겼다.
우선 나를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연습을 통해 내게 거리를 두었다. 내가 원하는 것 말고, 내게 필요한 것을 찾았다. 엄격한 부모가 아이를 훈육하듯 ‘오늘 ~해야해’가 아닌 ‘~ 해볼까?’라고 친절하게 대했다. 그래서 말도 안되는 목표를 세웠다. 5개년 계획을 세우고 움직이던 내가 하루 3줄 감사일기 적는걸 목표로 삼고 꾸준히 했다.(정말 유치하다고 생각한 감사일기가 효과가 있을 줄이야!). 그리곤 지금으로 나는 충분하다고 매일 말해주었다.
120%의 완벽을 요구했는데, 80%가 되면 컨펌을했다. 완벽이 아닌 완결하자로 목표를 바꾸고, 매일 작은 성공들을 완결했다. 체크한 것은 눈으로 확인했다(노션 to-do-list 활용). 체중이 줄었고, 체력도 약한 편이라 육체적으로 힘들지 않게 회사 근처로 과감히 이사를 했다. 마음을 힘들게 하는 사람과는 단호하게 관계를 끊고, 나에 대한 정보가 zero인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다.
기존의 나를 모르는 그들에게 나는 편하게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우울증에 걸렸고, 나는 부족하다, 그렇지만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라고. 조금씩 좋아진다고 느낀게 그 무렵이었다. 유치한 노력을 숨기지 않겠다고 다짐한 순간부터, 내가 우울증에 걸렸다고 누군가에게 말하기 시작한 그 이후부터.
시간이 지나고 나아진 지금이지만 아직도 그 때의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다. 과도한 목표 때문이었는지, 반복적이고 바쁜 생활 패턴 때문이었는지, 도전적인 과제 때문이었는지, 만족과 성취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갑자기 외로와서 그랬는지 말이다. 하지만 교묘하게 번아웃인 것 처럼 보이는 우울증은 일을 줄이거나 그냥 막연히 쉰다고 해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증상으로 힘들었던 그 때를 되돌아보면, 내 깊은 감정은 무시하고 외면했었다. 감정의 무시는 내게 행하는 폭력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감정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것이었다. 결국 알아주는가 알아주지 않는가의 문제이다. 또 언제 다시 이런 증상이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땐 더 여유롭게 대할 것이다. 괜찮다고. 받아들인다고. 그럴 수 있다고. 내 감정을 너무 감옥에 밀어넣지 말아야겠다. 잠깐 멈춰도 되니 누르지말고 밷어내겠다. “알아줌’이 전부일지도 모르겠다.